자신이 종식시킨 전쟁이 몇 개인데 이 정도면 평화상을 받을만하지 않냐고 자찬하는 트럼프대통령이 과연 올해 노벨 평화상을 받을까에 세계의 관심이 쏠렸었지요?    결과는 트럼프대통령이 아니라 베네수엘라의 야권지도자 마리아 마차도가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마차도가 베네수엘라를 떠나는 과정은 한 편의 첩보영화를 방불케 했습니다. 마두로 대통령의 독재를 종식시키려는 야권의 중심인 마차도는 당국의 체포령을 피해 은신하고 있던 곳에서 가발과 변장으로 본 모습을 감추고 우야곡절 끝에 베네수엘라를 탈출해 평화상 시상식장이 있는 오슬로로 이동했습니다.    다행히 도중의 여러 개 검문소는 무사히 통과했지만 작은 목선으로 강풍과 거친 파도가 이는 카리브해를 건너 퀴라소 섬에 이르는 과정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미군의 보호 작전으로 무사히 도착한 후 전용기로 오슬로에 도착했다더군요.    하긴 그가 수상자로 결정된 후 X에 올린 소감으로 베네수엘라의 국민에게 상을 바치며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이 상을 헌정한다고 할 정도로 친 트럼프 성향이라니 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요. 노벨위원회는 마차도가 베네수엘라 독재정권에 맞서고 국민을 단결시키는 인물이라는 것을 평화상 선정 이유로 내세웠지만 일각에서는 그의 과거 행적을 들어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마차도는 베네수엘라의 정권 교체를 위해서 무력 사용과 외국의 군사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어 평화가 아니라 폭력, 무력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 논란의 하나입니다.    또 그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 대한 무력행사에 친 이스라엘적 입장을 보이고 자국의 정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과 국제사회의 개입을 요구하는 외세 의존적 태도가 그를 반대하는 편에 논란거리를 제공합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란 말이 있지요. 라틴어 Pax는 ‘평화’를 의미입니다. 영어의 peace(평화)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제국이나 국가의 라틴어식 이름이 붙어 ‘한 국제 세력이 주도하는 장기간의 질서 또는 평화’로 쓰입니다.    그러니 팍스 로마나는 ‘로마 제국에 의해 질서 잡힌 평화’라고 읽을 수 있군요. 역사를 통해서 보면 팍스 아시리카, 팍스 몽골리카처럼 무수한 ‘팍스 무엇’이 있을 법도 합니다.    ‘1990년대 강력한 힘을 가졌던 냉전의 두 주축이던 소련이 붕괴된 후, 미국이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하면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는 말이 쓰이기도 했습니다. 이 ‘평화’ 역시 사전적 의미보다 ‘강대국인 미국의 힘에 의한 국제 질서’라고 해석하겠습니다. 이후 중동의 변화와 중국의 부상으로 팍스 아메리카나가 깨어지긴 했지만 최근 미국 대통령이 자국 중심의 고립주의를 선택하겠다고 공표하기 전까지 미국의 영향력은 여전히 세계질서에 큰 축을 쥐고 있었다고 봅니다.    결국 국제 정세 속에서 ‘평화’는 역설적으로 ‘강력한 힘’의 의미로 이해됩니다. 미국의 무력으로 자국 정치를 해결하려는 마차도의 태도는 평화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마차도 이전에도 노벨 평화상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편향성, 친미 성향, 수상자의 행보 등이 논란이 되며 노벨 평화상은 ‘정치적’ 상이라는 인식이 없지 않습니다.    취임한 지 1년도 안 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노벨상을 받을 때 오바마 본인도 ‘내가 왜?’라고 생각했다할 정도로 시기상조인 경우도 있었고, 야세르 아라파트 PLO(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의장의 무장 테러 전력, 아웅산 수치가 로힝야족 인권 침해와 대량 학살에 침묵한 일 등 수상자의 자격과 행보에 논란이 있는 반면 20세기 평화운동의 상징인 간디는 몇 차례 후보에 올랐지만 끝내 수상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베네수엘라의 마약 카르텔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마약 운반이 의심되는 카리브 해상의 선박에 무력을 사용해 수십 명의 사망자를 낸 데다 최근에는 베네수엘라 정권 자체를 테러 조직으로 지정하여 해상 봉쇄와 공습을 감행하고 있다는 뉴스를 전해 들었습니다.    베네수엘라 정권 교체를 위해 미국의 군사 개입을 요구한 마차도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것을 트럼프 정부는 베네수엘라에 대한 무력 사용에 면죄부를 얻은 것으로 생각하는 걸까요?    독재정권을 몰아내고자 타국의 무력 개입을 요구하여 무력을 무력으로 대응하려는 올해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원하는 평화는, 또 노벨상 선정위원회가 생각하는 평화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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