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여왕은 신라 27대 선덕여왕이다.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다는 골품제로 인해 부왕인 진평은 선덕을 왕으로 등극시키는 무리수를 둔 것이다. 때문에 여왕시대를 맞아 주위의 반발과 냉대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편을 마련해야 했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왕이 미리 알아낸 세가지 일이라는 제목으로 지기삼사(知幾三事)를 수록하고 있다. 첫째는 당태종이 보낸 모란꽃 그림에 대해 꽃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둘째는 영묘사의 옥문지에서 엄동설한에 개구리가 우는 것을 보고 여근곡에 백제군이 매복해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셋째는 자신을 도리천인 낭산에 장사 지내라고 하자 신하들이 어리둥절했으나 훗날 무덤아래 사천왕사가 들어섬으로써 그곳이 도리천임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선덕의 신이한 능력을 보여주는 지기삼사를 톺아보면 다분히 신성한 군주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는데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벌과 나비가 없는 모란꽃을 보고 향기가 없음을 알았고 이는 남편이 없음을 비웃는 당태종의 의도를 꿰뚫어보는 총명함을 선덕에게 쒸운 것이다. 이는 여왕의 자질을 남성군주 이상으로 격상시키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당태종의 모란도는 수이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사기에서는 선덕이 공주시절에 부왕인 진평왕과의 대화내용으로 소개해 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유사에서는 선덕왕 재위시절 비범한 예지력을 보여준 일화로 변용했다.또 선덕을 사모했던 지귀의 심화요탑 로맨스를 유사는 이혜동진조에서 영묘사 화재를 예견한 혜공스님의 신이한 능력으로 차용하고 있다. 물론 수이전에 등장하는 지귀와 선덕의 로맨스도 거슬러 오르면 인도의 용수가 지은 대지도론에 나오는 술파가설화가 원전이다. 모란꽃 일화의 경우 설화적인 공정과정을 거쳐 구전돼 오던 이야기를 수이전이 수록하고 사기나 유사가 인용 또는 변용함으로써 사실(史實)이 된 사례라 할 수 있다. 모란은 당태종때가 아닌 고종때인 660년에 측천무후가 황궁으로 이식해 헌종때인 685년 이후 성횡한 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신문왕때 모란을 꽃의 왕으로 설정한 설총의 화왕계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 모란도가 대중화되는 시점과 일치한다. 더구나 모란이 그림으로 등장하는 시기도 701년 이후로 8세기말에 모란을 잘 그렸다는 변란이라는 화가가 등장하고 모란이 회화의 소재로 대중화 된 것이다. 또 모란도에 나비를 그리지 않는 것은 나비접(蝶)이 노인을 뜻하는 질과 발음이 같아 나비를 그리지 않는 것이 정석임을 수이전에서는 간과하고 있다. 당태종은 649년 선덕은 647년에 죽었는데 685년 이후 성횡한 꽃 그림이 태종때에 그려져 신라에 보냈다는것 자체가 史實이 되기에는 무리라 할 수 있다. 선덕의 총명함과 신이적인 능력을 내세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선덕이 여왕이기에 왕권의 신성함을 보다 더 강조하려는데 있었다. 더구나 낭산을 수미산 도리천으로 지목해 자신의 시신을 묻어 달라는 선덕여왕의 유언은 가섭불시대에 교시가라는 여인이 부처님께 귀의하여 수도를 하다 열반에 들고 도리천주가 됐다는 불교설화와 결코 무관하다 할 수 없다. 또 선덕이라는 시호도 불경에 나오는 선덕바라문에서 연유한 것으로 도리천에 묻히고자 하는 유언은 도리천의 왕이 되고 싶다는 선덕바라문의 염원과 일치한다. 결국 선덕의 지기삼사는 성골남진(聖骨男盡)으로 여왕이 즉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선덕의 정치적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제반장치의 일환이며 왕권강화를 위한 상징조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재임중 황룡사9층탑과 첨성대와 분황사건립을 통해 남성군주 이상의 배포를 과시한 것 역시 여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다양한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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