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는 밤이면 우리는 어김없이 제야의 종소리를 기다린다. 각계 대표들이 서울 보신각에 모여 33번 종을 울리면 TV를 보던 국민들은 드디어 새해가 시작됐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새롭게 다잡는다. 제야의 종은 단순한 연말 이벤트가 아니다. 33번의 타종은 불교적 의미로 번뇌의 세계를 상징한다. 하지만 제야의 종은 단순한 숫자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어둠 속의 중생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알리는 부처님의 일갈과도 같다.종이 울릴 때 우리는 많은 기도를 하고 다짐을 한다. 새해에는 가족 모두 건강하게 지내고 재화가 쏟아져 경제적으로 시름을 덜게 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술을 끊고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거나 직장에서 맡겨진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해 능력을 인정받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한다. 그러나 종이 멎은 뒤에도 대부분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쌓여 있는 걱정과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고 미뤄둔 결심은 다시 내일로 넘어간다. 뭐 산다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마음먹은 대로 다 이뤄진다면 추운 겨울밤에 무슨 연유로 종을 두드리겠는가.기독교 문화에서도 종은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교회의 종소리는 공동체를 향해 열린 울림이다. 예배의 시작, 기도의 시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알리는 의미를 지닌 교회의 종소리가 울리면 지금은 세속의 시간이 아니라 거룩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종소리 하나로 마을 공동체 전체가 하나의 시간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므로 교회의 종은 멀리 울리고, 널리 퍼진다. 물론 교회의 종은 제야에만 울리는 것은 아니지만 날마다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이왕 종소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힌두교의 종소리도 한번 살펴보자. 힌두교 사원 입구에는 여지없이 종이 매달려 있다. 힌두교도들은 사원에 드나들면서 반드시 그 종을 울린다. 그 종소리는 단순한 신호음이 아니라 우주를 이루는 근원적 진동을 상징하는 소리며 낡은 생각과 혼란을 떨쳐 내고 신성한 질서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선언이다. 옛 시간과 새 시간을 가르는 경계음이며 과거를 정리하고 신성한 현재로 들어가기 위한 전환의 소리다.우리 전통신앙에서의 종소리도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와 소통하는 신성한 울림으로 인식했다. 맑고 긴 종소리는 부정과 잡귀를 몰아내고 흐트러진 기운을 바로잡아 공간을 정화하는 힘을 지닌다고 여겼다. 그래서 종이나 방울은 제의와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도구로 사용됐으며 그 소리가 울리는 순간 일상의 공간은 신령이 드나드는 자리로 바뀌었다. 또 시간의 경계를 알리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익숙한 제야의 종은 불교적 의미와 우리 전통신앙이 혼합된 의식이라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지나간 시간의 근심과 액운을 보내고 새로운 질서와 복을 맞이하는 의미를 담고 송구영신을 소리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새 마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전환의 계기를 촉구하는 것이다.비틀즈의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의 노래 ‘Ding Dong, Ding Dong’의 내용은 우리의 제야의 종이 던지는 메시지와 많이 닮아있다. 이 노래는 ‘Ring out the old, ring in the new/Ring out the false, ring in the true. (종을 울려)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라/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받아들여라.’를 무수하게 반복한다. 조지 해리슨은 ‘딩동 딩동’ 종을 울려 새해에는 낡은 자아와 낡은 습관을 끊고 새 질서로 넘어가자고 제안한다. old→new, false→true를 반복하는 것은 새해가 밝아 단순하게 새 달력을 벽에 거는 것에 그치지 말고 인식의 틀을 바꾸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다.또 ‘Yesterday, today was tomorrow/And tomorrow, today will be yesterday. 어제는 오늘이 내일이었어/그리고 내일은 오늘이 어제가 될 거야.’라는 의미 있는 말도 한다. 새해가 특별한 기적이라기보다 시간이 계속 접히고 펼쳐지는 흐름의 연속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새해의 결심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매 순간 반복해야 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강조한다. 제야에 울리는 종소리는 거짓과 낡음과 관성을 종소리와 함께 날려보내고 새롭고 진실되며 의욕적인 삶을 시작하고 건너가는 문고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새겨야 할 것은 종소리는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우리의 의식을 바꾸라는 사자후와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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