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의 계절이다. 이에 일조량이 점점 감소되는 느낌이다. 지난 해 동지(冬至) 때는 오후 5시만 돼도 금세 사방에 땅거미가 짙게 깔렸었다. 해가 짧아질수록 옅어지는 햇살이 못내 아쉽다. 하여 이즈음 한낮엔 밖에 나가서 ‘햇빛 바라기’를 하곤 한다. 
 
이 때 만큼 온 누리에 금 빛살처럼 퍼지는 햇살을 고마워 한 적이 없는 듯하다. 지난여름 혹서(酷暑)때엔 태양빛을 마냥 원망까지 했었다. 마치 용광로 속 같은 열기를 거침없이 내뿜는 태양이었잖은가. 하지만 겨울철이 찾아오자 옷깃을 스치는 칼바람이 더위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 이 탓에 따순 햇빛 한 줄기가 새삼 고맙기 그지없다.
햇빛은 만물을 소생 시키는 힘을 지녔다. 또한 식물들이 향을 발산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필자가 여섯 살 때 일이다. 장마가 그치고 아침부터 햇빛이 쨍쨍 내리 쬐는 어느 날 일이었다. 어머니를 따라 집 근처 숲엘 갔다. 숲 속에 들어서자마자 신선한 풋 내음이 코끝을 자극했다.
이 냄새 근원지가 궁금하여 어머니께 여쭸다. 어머닌, “ 이 냄새는 햇빛 냄새란다.” 라고 하였다. 이 말씀에 ‘어떻게 해님은 숲 속에서 이런 냄새를 맡을 수 있게 할까?’ 어린 마음에 태양이 참으로 신기했다. 걸음을 멈춘 채 한참 하늘을 우러러 봤다. 그 후 초등학교 4학년 작문 시간에 ‘향기’ 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선생님께선 아이들 앞에서 이 글을 읽어주며 너무 잘 썼다고 칭찬을 하였다.
기억은 희미하다. 하지만 대략 글 들머리를 이런 내용으로 시작했었다.‘해가 질 무렵, 숲에 가면 그 숲에서는 항상 햇빛이 남겨둔 냄새가 난다’라고 말이다. 이 글은 여섯 살 때 숲에서 맡았던 추억 속 내음을 되살리며 썼던 것이다.
숲이 풍기는 냄새는 ‘지오스민’ 아니던가. 이 냄새는 주로 ‘지오스민’이라는 화합물로 인해 발생한다. 이 화합물은 토양 속 미생물들이 분해 하는 과정에서 생성된다. 비에 의하여 젖은 흙이 햇빛에 마르면 에어로졸 형태로 이 냄새를 공기 중에 방출 한다. 이로보아 어찌 보면 지난날 어머니 말씀이 어느 정도 맞은 셈이다. 숲 속 내음에 햇빛도 일조해서 이다.
지난 가을, 마을 앞 호숫가 숲 속을 찾았을 때 지오스민 냄새 때문인지 매우 상쾌했었다. 스트레스마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이 때 뜬금없이 ‘숲의 내음 못지않은 향취는 어떤 향일까? 어쩌면 사람한테서 맡을 수 있는 인향(人香)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각박한 세태여서 인가.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할 줄 알며 진정성을 갖춘, 사람다운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이가 그립다. 이런 성품이 진정한 인향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인향을 논하노라니 1970년대를 대표했던 포컬 듀오, ‘4월과 5월’ 노래인 ‘장미’ 노래 가사가 문득 떠오른다.
‘당신에게선 꽃내음이 나네요/잠자는 나를 깨우고 가네요/싱그런 잎사귀 돋아난 가시처럼/어쩌면 당신은 장미를 닮았네요/당신의 모습이 장미꽃 같아/당신을 부를 때 당신을 부를 때/장미라고 할래요<하략>’
필자도 한 때 위 노래 가사처럼 아름다운 꽃내음을 지녔던 적이 있었나 보다. 젊은 시절 무역회사 사장 비서로 근무 할 때 일이다. 그 회사 여 사장님은 필자에게, ‘장미’ 라는 별명을 붙여줬었다. 이름 석 자 대신 걸핏하면 남들 앞에서, “장미 씨!”라고 부르곤 했었다. 하루는 그녀에게, “왜? 장미라는 별명을 지으셨느냐?”고 물었다. 
 
이 말에 사장은 필자가 매사 정확하면서도, 신중하며, 장미처럼 남다른 향기가 나서 이 별명을 지어 주었다고 했다. 그 당시엔 그녀가 장미란 별명으로 부를 때마다 왠지 매우 듣기 싫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니 솔직히 그 시절이 마냥 그립다.
이젠 젊은 시절 풍기던 사람다운 내면 냄새도 희석 된 듯하다. 삶에 찌들고 우매함에 갇혀서 맑은 영혼과 지혜도 상실한 듯하다. 그러나 나이들 수록 유연한 사고를 지녀야 할까보다. 무엇보다 이런 생각은 수명에도 도움이 된다고 해서이다.
드디어 2026년 병오년 새해가 밝았다. 올핸 가급적이면 매사 샤프하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그동안 잃었던 인향을 다시금 되찾도록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