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간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교양지가 되어 주었던 샘터가 올해 1월호를 발행하고 휴간에 들어간다고 한다.1970년에 창간한 샘터는 국내최장수 월간 교양지라는 역사와 함께 유명한 문인들의 글과 삽화 그리고 평범한 독자들의 투고등으로 폭넓은 독자층을 형성하여 한때 50만부를 발행할 정도로 많은 사랑과 큰 인기를 끌었다 한다.발행인 김성구씨는 결코 폐간이 아니며 다시 권토중래하여 반드시 잡지발행을 이어갈 것이라고 비장한 각오를 힘주어 밝히고 있다.나도 간혹 독자가 되어 크지도 두껍지도 않은 샘터를 읽으면서 잔잔한 감동과 함께 보통 사람들의 소소한 행복에 공감하면서 좋은 잡지란 생각을 가졌기에 그런 샘터가 휴간한다는 사실에 안타깝고 짠한 마음에 꼭 다시 잡지 발행이 이어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오늘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샘터와 관련하여 정확히 샘터 초기 발행인이자 창업자인 김재순 전 국회의장에 대한 회상과 더불어 이와 관련된 내 젊은 시절에 대한 추억이 불현듯 가슴 가득히 밀려와 글을 쓰게 되었다는 점이다.어디 써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내 젊은날의 초상이 오늘 아침 샘터와 관련한 어느 일간지(조선일보 아무튼 주말)속에 김재순 전 의장의 사진과 샘터기사가 나를 소환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가슴 먹먹한 그때의 기억이 새삼스럽고 내 인생의 잊히지 않은 연대기적 사실의 흐름이자 축적이다.이야기는 1964년부터 1967년 까지 4년여의 사이의 일이다. 김재순 전 의장이 샘터를 창간한 것이 1970년, 현재 그의 네째 아들이며 발행인인 김성구씨가 66세, 그리고 이글을 쓰는 필자가 칠십아홉이니 타임캠술을 타고서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야할 거리이고 세월이다.내가 김재순씨와 그의 부인을 처음 본것은 1964년도 어간이고 몇년간은 자주 보고 만나게 될 기회가 있었다. 나의 유년의 회상과 지난날의 회고는 그리 밝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그래도 빼놓을 수 없는 기록이다.당시 집안 형편과 어머니 병환으로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진학이 어려웠던 나는 중학교 교장선생님의 주선과 배려로 자신의 며느님이 경영하던 약국 점원으로 상경하게 되었으며, 조건은 일년간 무보수로 일하고 그 다음 됨됨이를 봐 잘하면 3년간 낮에는 약국 점원으로 근무하고 밤에 야간 고등학교를 보내준다는 것이었다.그리하여 서울상경이 이루어 졌고 그 약국 소재지가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지만 성동구 신당동 472번지 대학약국이다.바로 약수동 네거리에서 장충단 체육관으로 올라가는 오른쪽 중간지점에 위치한 곳이었고 약사는 이대 약대출신의 안효숙 여사, 부군은 나중에 단국대 부총장을 역임했던 장상호 교수였다.당시는 의약분업이 되지않아 모든 약의 권유와 판매는 약사가 증상을 듣고 하였으며 점원은 약사가 없을 때 약사를 대신해 약을 팔고 했다. 당시 약국주인인 안효숙 여사는 이대 약대 강사로 약국을 비우게 되면 유일한 점원인 내가 약을 권하고 팔곤 하였다. 물론 어깨 너머로 약사에게 배운 지식과 함께 약국에 비치된 약의 종류,이름,효능,가격까지 깡그리 외우고 있었던 나는 그런대로 약국을 찾는 고객들에게 약사가 없다고 돌아서게 하지 않을 정도로 그 참 ! 신통하다 , 똑똑하네 하는 반신반의의 칭찬과 함께 때로는 너가 약사야, 뭘 안다고 떠들어 하며 돌아서는 손님도 간혹 있게 만든 준 보조 약사였다.이야기의 본질이 이게 아니다. 그렇게 4년가까이 약국에 있다보니 약국에 자주 들리는 인근 주변사람들을 많이 보고 알게 되었다는 점과 약국의 위치가 소위 부촌지역에 위치해 약국 근처에 당대 꽤 유명했던 인사들이 살고 있어 가끔 그들을 약국에서 보고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때로는 약사님과 함께, 약사님이 안계실때는 나혼자 단독으로 약국 뒷쪽 주택에 살고 계셨던 김재순씨는 당시 여당 원내총무(당시는 대표가 아닌 총무였음)로 매일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독특한 얼굴모습으로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명사였고 부인되시는 분은 곱상한 미모와 자상한 성격으로 약국에 들릴때 마다 좋은 인상과 호감을 준 분이었다.말이 나온 김에 약국 앞 장충로 길건너 바로 맞은 편에는 그 유명한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살고 있었고 그 옆에는 유근창 병무청장이, 그리고 신상옥씨 주택 조금 뒷편에 엄앵란씨 삼촌되는 음악가 엄토미씨가 살고 있었다.우선 김재순씨는 아주 가끔 퇴근길에 들려 약을 사가기도 했고 부인은 단골일 정도로 자주 약국을 찾아 지금도 그 모습이 선하다. 물론 나와 대화도 하면서 야간 고등학교 열심히 잘 다니라고 격려도 해 주었다.신상옥 씨도 가끔 길을 건너 약국에 들러 약을 사 갔으며 최은희씨는 신상옥씨 보다는 더 자주 약국을 찾았는데 두사람 다 항시 썬글라스를 쓴 모습이었고 함께 산책을 하다 동시에 약국을 찾는 경우도 있었다.그때 생각만 해도 최은희씨는 눈이 부실만큼 젊고 아름답고 전형적인 동양미인이었다는 생각이다. 상경하기전 시골 초등학교 마당에서 상록수 영화를 보면서 여주인공 최은희에 흠뻑 매료 되어있던 촌놈인 나로서는 최은희란 실물을 그것도 눈앞에서 마주하며 약을 팔았으니 그 감격과 흥분이 어떠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해 주시기 바란다.당시는 요즘처럼 팬들이 극성을 부리며 떼를 지어 배우나 가수집을 찾는 요란법석이 없었기에 최은희씨가 약국에 들릴 때 나 역시 팬인체도 하지 않고, 사인을 요청하거나 열렬한 호감이나 반색을 보이지 않았으며, 약국인근의 세탁소나 가게 손님들도 먼발치로 바라볼뿐 몰려들어 손을 잡고 환호하거나 사인공세를 하는 일은 일체 없었다. 참고로 그 당시 약국을 찾았던 유명인들이 주로 찾았던 약은 두통약·소화제·피로 회복제 드링크류 였다.별 이야기도 아니고 하나도 가슴에 와닿는 이야기 거리가 아니다. 다만 나로서는 오늘 아침 잡지 샘터와 관련하여 당시 약국에 점원으로 근무할 당시 뵈었던 김재순 초대 발행인, 그리고 잡지발행을 접게된 아들 김성구씨 이야기를 접하면서 김재순씨와 부인께서 저승에서나 혹시 내가 쓴 글을 보고 당신이 그때 대학약국의 점원이었던 야간고등학생 그 학생이란 말이오 하고 반색이라도 할 것 같은 착각과 함께 어쨌든 샘터는 우리 함께 부활시킵시다라는 목소리가 들릴 것 같은 환청으로 글을 쓴다.샘터는 반드시 부활하여 다시 우리곁으로 돌와 올것이라 확신과 염원이 나를 비롯한 많은 국민들에게 샘물 처럼 번져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샘터 , 참 좋은 괜찮은 잡지였는데.... 그러고 보니 내 아호가 東泉, 동쪽의 샘, 동편의 샘터와 샘물이 아니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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