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 산책' 은 삼국유사의 되돌아 봄이요 경주땅에 널브러진 시공간의 편린들을 오늘의 언어로 짜맞추는 역사여행이다. 그속에는 신라가 있고 고려와 조선이 있는가 하면 돌아오는 길에는 오늘이 있다.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준다. 아니 역설적으로 역사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 스스로 느켜야 할 뿐이다. 역사를 본다는 것은 느끼는 것이다. 경주의 문화유산을 보기위해 경주를 찾는다면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느끼기 위해 와야 한다.
공자는 본다는 의미를 세 단어로 구분했다. 보일 시(視)와 볼 관(觀) 그리고 살필 찰(察)이다. 시(視)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현상을 말하며 영어로는 보다, 보이다라는 see라 할 수 있다. 아무런 감각의 개입없이 수동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다. 무엇을 보고자 하는 목적도 생각도 느낌도 없는 그냥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다.
그 다음은 볼 관(觀)이다. 단순히 본다는 의미가 아닌 동기나 의도까지 보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목적을 내포한다. 영어로는 쳐다보다라는 look이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 보고자 하는 능동적인 상태의 의식작용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은 살필 찰(察)이다. 보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대상에 대한 마음가짐이나 상태까지 살펴봄을 말하며 영어로는 응시하다라는 gaze다. 응시한다는 것은 피상적인 것에서 나아가 내면까지 관찰하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편안함과 불편함까지 간파하는 것이 찰의 본질이다.
거리를 질주하는 자동차를 보면서 차들이 많이 다니네라는 것은 그냥 거리의 상태를 본 것에 불과하다. 그중에서 독특한 색상의 차가 눈에 들어오거나 비싼 외제차가 눈에 들어왔다면 단순히 본 것이 아니라 관심의 대상으로 관의 자세로 살펴 봤다는 것이다. 또 차선을 이탈하면서 곡예운전하는 차량을 보면 우리는 음주운전차량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며 차량의 이상유무까지 판단의 영역을 확장하게 된다.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예의주시하게 되고 운전자가 정상인지 아닌지 차량상태까지 미루어 짐작하는 등 판단의 영역이 확장되는 것이다.역사를 본다는 것은 관이요 찰이다. 역사를 관찰없이 보면 역사는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를 관찰하면 무수한 얘기를 들려준다.
허물어진 주춧돌 하나에도 천년의 시간이 녹아있고 둥근 주츳돌에 올려졌던 둥근 기둥도 말없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부석사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서 바라보는 차경에 감탄할 것이 아니라 천년을 버텨온 기둥의 질감과 재질을 관찰하면 사찰 주변의 산림까지 예사롭지 않다.
 
사찰의 기둥이 소나무라는 고정관념은 조선시대의 산물이며 신라 고려때만 해도 주변에 자생했던 느티나무가 한 몫을 했다. 부석사의 배흘림기둥이 소나무가 아니라 느티나무인 것처럼 신라 고분의 총아인 천마총도 관의 재질은 느티나무였다. 또 신라 금관의 화려함 이면에는 변변한 금광도 없었던 신라에서 사금을 채취해 황금의 나라를 만들었던 민초들의 고단한 노역의 그림자가 서려있다.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에서는 전설과 종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승의 원음'을 찾는 여정이어야 한다.'진리의 소리는 천지간에 진동하건만 그 울림을 듣지 못한다'는 의미를 느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는 관세음(觀世音)이란 단어처럼 소리를 볼 줄 아는 지혜를 요구한다. 신라 천년의 역사 또한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경주인 스스로 느켜야 하고 관광객 또한 느끼고 가도록 해야한다.
그것이 역사를 배우고 가꾸는 우리의 목적이며 자세다. 보고 보고 또 보면 경주가 새로워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