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4일은 우리 지구에서 태양까지 거리가 가장 가까운 위치였던 날이었다. 이를 근일점(perihelion)이라 한다. 반대로 지구와 태양까지 가장 먼 거리는 원일점(aphelion)이라 하며, 올해는 7월 7일이다. 
 
이렇게 지구와 태양의 거리가 일정하지 않은 이유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원운동이 아닌 타원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태양에 근일점일 때 지구는 가장 더울듯하다. 이글거리는 태양에 가깝기에. 
 
그런데 불덩어리 태양에 지구가 가까울 때 매우 춥다. 이렇게 추운 이유는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이때 세차운동(precession)으로 자전축 경사 방향이 변하면 근일점과 원일점에서 계절도 바뀌게 된다. 물론 이 또한 우리나라가 위치한 북반구 기준이다.
이렇게 모든 원리를 이야기해야 우리는 어떤 현상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처럼 모두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화자의 의도에 따라 필요한 것만 이야기한다. 하나씩만 얘기하여 사실을 잘못 알게끔 한다. 
 
물론 이런 원리를 알지 못해서 이야기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일부만 알기에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문제는 모든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음에도 일부러 특정의 사실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매우 안타깝다. 최근 불거진 조진웅, 박나래 사건에서 이런 안타까운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사건의 내막은 기껏해야 미디어를 통해 나오는 것밖에 알지 못하기에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다. 
 
다만 이 두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정 사실만을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이전 다른 비슷한 사례와는 달라서 이례적이라 말할 수 있다. 명백한 사실이 여럿 있는데도 근일점만 혹은 원일점만 보며 이야기한다. 즉 내 편만 무조건 옳다는 우리/그들 논리에 따라 하고 싶은 말만 한 것이다. 이런 현상을 로버트 새폴스키는 『행동』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뇌가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인종의 얼굴을 보았을 때, 우리 뇌의 편도체는 50 밀리초 안에 활성화된다. 그러면서 인간 뇌는 우리/그들 가리기를 황당하리만치 빨리 알아낸다. 
 
더구나 실험에 의하면, 집단을 나누는 근거가 아무리 허약하더라도(예를 들어 영화 오징어 게임처럼 아무 조건 없이 ○×로 나누더라도) 일단 집단이 꾸려지기만 하면 인간은 파벌적 성향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그들을 더 나쁘게 보기보다는 우리를 더 좋게 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다른 영장류들도 초보적인 수준에서 우리/그들 가르기를 드러내지만, 우리의 독특함에는 따라오지를 못한다. 우리/그들 가르기는 세상에 크나큰 고통을 만든다. 그러나 우리/그들 가르기 이분법을 치료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물론 우리 뇌의 편도체를 망가뜨리면 가능하기는 하다. 그렇다고 우리의 편도체를 망가뜨릴 수는 없지 않은가. 스트레스는 몸에 나쁘다. 
 
그런데도 스트레스 연구자들의 목표도 스트레스를 치료하는 것, 즉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스트레스 제거는 불가능하다. 인간은 올바른 종류의 스트레스를 즐긴다. 그것이 ‘자극’이다. 스트레스를 대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그들 가르기 문제 또한 즐겨야 한다. 이 세상에 늘 우리/그들 가르기와 같은 편 가르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항상 옳은 편에 서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위 두 사건을 보며, 이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을 알 수 있다. 합리적인 듯 보이는 것이 합리화에 불과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옳은 관점 취하기를 지속적으로 연습해야 한다. 그래야만 어떤 현상이 일어났을 때 올바른 관점을 취할 수 있다. 물론 옳은 관점 취하기는 평범한 소시민보다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더 많이 연습해야 한다. 이것이 그들의 역할이기도 하지만 이를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원자력발전소 보안 경비를 담당하는 우리 조직, 시큐텍(주)에서 이렇게 편 가르기를 하면 어떻게 될까? 동일한 내용인데도 어느 사람은 출입시키고 어느 사람은 출입을 거부한다면? 따라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옳은 편에 서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익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친구이고, 그들은 적이다.”라며 편 가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엘리 위젤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라는 말을. 이는 사랑과 미움은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는 의미다. 이 깨달음은 로버트 새폴스키의 말처럼 “우리의 행동에서 공격성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시킨다. 
 
우리는 잘못된 종류의 공격성을 싫어할 뿐, 옳은 맥락의 공격성은 좋아한다. 거꾸로 아무리 칭찬할 만한 행동이라도 잘못된 맥락에서는 전혀 칭찬할 만하지 않게 된다.”라는 말로 이어진다. 결국 우리/그들 논리에 따라 각각 사랑과 미움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일 뿐 서로 엇비슷한 것이다. 우리에겐 오히려 무관심이 더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