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영천으로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북안면 사무소를 지나 도유리 마을 진입로에 광주이씨 시조 묘 입구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이 묘소에 얽힌 사연이야말로 개인주의 사회로 변해가는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묘소의 주인공은 광주이씨 시조 이당의 묘소로써 원래 이곳은 영천 최씨인 천곡(최원도)의 소유지이고 최원도와 이당의 아들 둔촌(이집)과는 과거 입문 동년 생으로 절친한 친구였다. 고려 말 신돈의 득세에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최원도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와 은거하고 있었다. 
 
둔촌 역시 신돈의 횡포를 신란하게 비판하였기에 후환이 두려운 나머지 연로한 노부(이당)를 등에 업고 영천에 있는 최원도를 찾아 나선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최원도의 집에는 마침 그의 생일이라 마을 주민들이 모여 주연을 베풀고 있었다. 
 
둔촌 부자는 바깥 툇마루에 앉아 천곡을 찾았지만 천곡이 반기기는커녕 대노하면서 “망하려거든 혼자나 망할 것이지 어찌하여 나까지 망치려고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할망정 화는 싣고 오지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소리치며 사정없이 내 쫓았지만 이 모든 사실은 주위의 시선 때문이었다. 
 
둔촌은 하는 수 없이 그곳을 떠났고 천곡은 역적이 앉았다 간 자리라 하여 툇마루에 불까지 질러버렸다. 날이 어두워지고 손님들이 돌아가자 천곡은 둔촌이 노부를 등에 업었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라 생각하고 찾아 나섰다. 
 
그는 마을 뒷산에 숨어있던 둔촌 부자를 발견하고 반갑게 서로 얼싸안으며 집으로 데려와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집 다락방에 숨겼다. 천곡은 가족들에게도 이 사실을 비밀로 하고 식욕이 왕성해졌다며 밥과 반찬을 많이 담게 해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이렇듯 4년이나 다락방에 피신 생활을 하였다.
긴 세월 동안 계속 많은 밥을 비우는 주인의 식욕을 이상히 여긴 여종 제비가 문구멍을 통해 들여다보고 놀라 안방마님께 고하게 되었고, 그 말이 결국 천곡의 귀에까지 들어왔으며 이것은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사실이 주위에 알려지게 되면 역적을 숨겨주었으니 양쪽 가문 모두가 멸문지화(滅門之禍)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식솔들에게 함구하라는 주의만 주고 생활하던 중 주인의 심각한 표정에 여종 제비는 결국 자결하고 만다. 그리고 이듬해 둔촌의 부친도 돌아가셨다. 
 
천곡은 모든 예를 다 갖추어 자신의 어머니 산소 아래에 장사지냈으며 둔촌 부자를 쫓아버린 상황을 목격한 동네 사람들의 증언으로 역적도 모면하게 되었다. 이곳은 영남 제일의 명당이고 “야(也)”字 형의 명당으로 조선의 8대 명당 중의 1곳에 속하니 광주이씨의 후손은 크게 번창하고 많은 벼슬이 나왔다. 
 
이러한 연유로 광주이씨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묘제를 올릴 때마다 바로 위쪽에 있는 최원도 어머니의 묘제도 같이 올리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우정이야말로 각박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