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 1월 5일 배우 안성기(安聖基, 1952~2026)가 타계했다. 그는 다섯 살에 ‘황혼열차(1957)’로 시작하여 유작 ‘노량 : 죽음의 바다(2023)‘ 에 이르기까지 40년 넘게 17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인생을 오직 배우로만 살았다. 새삼 그의 예전 영화 세 편이 기억난다. 첫째는 ‘겨울 나그네(곽지균 감독, 1986)’이다. 최인호(1945~2013)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주연은 ‘안성기, 강석우, 이미숙, 이혜영’이었다. 음악을 전공하는 여대생 다혜(이미숙)와 순수한 영혼의 대학생 민우(강석우)는 자전거에 부딪쳐 처음 만나게 된다. 현태(안성기)는 민우와 단짝인 선배로 나오는데, 민우는 결국 기지촌의 은영(이혜영)과 맺어지고 삼각 만남을 하던 현태와 다혜는 결혼하게 된다.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 는 실연 후 겨울을 떠도는 나그네의 고독과 절망을 24곡으로 그린 작품으로, 특히 제5곡 ‘보리수’ 가 알려져 있다. 제목은 슈베르트처럼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쓸쓸하게 겨울 들판을 지나는 듯한 민우를 상징한다. 순수하던 청년 민우는 결국 범죄에 휩쓸려 어둠의 속에서 몰락하고 만다. 이 모든 일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현태, 안성기가 떠오르는 것이다. 둘째는 ‘남부군(정지영 감독, 1990)’이다. 주연은 ‘안성기, 최민수, 최진실, 이혜영’이다. 빨치산이던 이태의 수기를 영화화한 것으로, 안성기는 산속에서도 만년필을 소지하던 지식인 이태 역을 맡았다. 영화는 최진실의 데뷔작으로 지리산에서 촬영 내내 안성기의 따뜻한 보살핌이 없었으면 최진실 신드롬은 없었을런지도 모른다.빨치산은 러시아어 ‘파르티잔’ 이 어원으로 비정규 게릴라 부대를 뜻한다. 곧 노동자, 농민으로 구성된 유격대와 가까운 의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1945년 해방 이후부터 55년까지 활동했던 공산주의 비정규군을 말한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진길이 막히자, 1950년 11월 이현상은 남반부인민유격대를 창설, 지리산, 덕유산 일대에서 투쟁을 한다. 이승만 정부는 1950년 10월부터 1953년 5월까지 세 차례 토벌 작전을 전개하고 1956년 12뭘 말 대부분 소탕한다. 1988년 펴낸 이태의 자전적 소설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그는 이후 전향하여 작가로 살게 된다.셋째는 ‘태백산맥(임권택 감독, 1994)’이다. 주연은 ‘안성기, 김명곤, 김갑수, 오정해’이다. 안성기는 염상구 역의 김갑수와 대비되는, 부자집의 지식인 김범우 역을 하는 데 입고 있던 흰 두루마기가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6.25 동란의 민족상잔을 나타내는 듯 하였다. 벌교에 있는 ‘조정래문학관’에는 독자들이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필사한 육필원고들이 원고지 탑을 이루며 쌓여 있다. 소설로 나라가 들끓던 그런 시대였다. 영화 ‘태백산맥’은 청룡영화상 작품상을 수상하고 신인 배우 ‘김갑수’ 의 대종상 남우주연상 수상 사진이 충무로역에 걸려 있다. 나는 스티브 맥퀸을 닮은 이 배우의 전라도 사투리가 하도 진짜 같아 그의 고향이 그런 줄 알았으나, 후에 서울이란걸 알게 되었다.태백산맥은 영화 개봉이 취소되는데, 이유는 벽에 걸린 김일성 사진과 인공기가 문제였다. 그 후 TV 추석 명절 특집으로 방영 예고했으나, 우익 단체의 반대로 프로그램이 대체된다. 소설가 조정래는 이들의 테러 협박에 시달렸고 책이 판매 금지가 되기도 했다.시절은 아직 암울한 반공의 시기였고 이후 북한 공작원을 다룬 ‘쉬리(감독 강제규, 1999, 주연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김윤진)’를 거쳐 ‘공동경비구역 JSA(감독 박찬욱, 2000, 주연 이영애, 이병헌, 송강호)에서는 아예 김광석을 좋아하는 북한군 초소 인민군과 친구가 된 판문점 헌병 이야기를 다룬다. 재향 군인회 등 반공 단체에서는 영화의 개봉을 저지했으나 관객의 반응은 실로 폭발적이었다. 영화는 아무도 상상을 못한 금기를 깨는 소재를 다루었다.작년 ‘영화가 좋다(’25. 12. 28)’에는 ‘배우 박중훈’이 출연해서 일생 안성기와 단짝으로 영화를 촬영한 소회를 밝혔다. 그는 그런 인격자와 평생을 같이 활동해서 큰 영광이라고 했다. 영화 ‘라디오 스타(이준익 감독, 2006)’ 마지막 장면에서는 매니저 (박민수)가 퇴물 가수 ‘최곤‘ 에게 우산을 씌워 준다. 안성기가 감독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안성기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한물간 가수에게 오직 진심인 사람, 그의 곁에 하나 남은 사람인 매니저는 우산을 내밀 것 같다’고 했다. 그 장면은 관객들에게 따뜻한 감동을 주었고 잊히지 않는 한국 영화사의 명장면이 되었다. 영결식에 온 가수 조용필은 그와 중3 시절 짝이라고 한다. 그해 그 교실에서 까까머리에 검은 교복 입은 친구는 이후 한 명은 대한민국의 거장 가수로, 또 한 명은 국민배우로 성장하는 것이다. 십 대 소년이던 이들이 육십 년 우정을 평생 이어온 것도 아름답다. 안성기는 TV 드라마는 출연하지 않았고 CF 섭외도 경계했다. 그가 살았더라면 넷플릭스 드라마에 출연할까? 그가 있을 때 한국 영화는 전성기였고 그와 함께 전성기도 가버렸다. 생전 그는 ‘마음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고 했다. 그는 이제 하늘의 별이 되었다. 그래서 깜빡이며 우리를 밝혀 주는 것이다. 故 안성기 배우의 안식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