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기에 훈장이신 종조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백부님께서 딸만 낳으시고 약관에 별세하시게 되어, 3남 2녀 중 장자로 태어나서 가례에 따라 백부 후사로 입양이 결정되었다.    4대 봉제사의 책임을 맡은 주손이 되어 할아버지의 특별한 애손지심의 덕택으로 천자문, 사자소학, 통감 등을 배울 수 있었다. 새벽에 기상하여 찬물에 세수하고 종조부 사랑방까지는 언덕에 올라 300m 허(許)의 거리를 걸어야 했다. 문하배를 올리고 방에 들어가면 종조부께서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전날까지 배운 문장을 전부 암송하고, 질문에 옳은 답을 하면 매일 새로운 넉 자를 가르쳐 주시면서 틀리지 않도록 외우게 하였다. 그래서 귀가할 때도 그 넉 자를 외우며 걸었고 마을 길 다닐 때도 동요 대신에 ‘천지현황(天地玄黃) 우주홍황(宇宙洪荒)...’을 노래처럼 외웠다.    당일 배운 것은 다시 할아버지로부터 확인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80년이 지난 지금에도 기억 속에 얼마라도 남아 있으니 감사하기 그지없고 또한 할아버지의 사랑을 잊을 수 없다. 천자문 한 권을 모두 배우고 최종 질의응답을 마쳤을 때 종조부께서는 의미 깊은 다음과 같은 생강 장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 정승댁 무남독녀가 과년하도록 결혼하지 않았다. 좋은 혼담이 여러 번 있었으나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매번 거부하여 집안 어른 모두가 걱정하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정승 직에 있었으니 혼처 또한 명문가의 총각이 소개되었다.    특이한 성격 특성과 과잉보호로 자란 탓으로 행동양식 또한 버릇이 없었으나 고명한 사장을 초빙하여 사서삼경을 배웠기 때문에 학문 수준은 괄목할 정도였다. 겨울 초입 김장철이었는데, 대문 앞에서 “채중개강(菜重介薑) 생강 사세요.”라고 외치는 노총각의 우렁찬 소리를 그녀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생강 장수가 ‘생강 사세요’라고 하면 될 터인데, 장수 주제에 귀중한 천자문을 들먹거리는 것이 특이한 자극을 주었기에 문지기에게 그를 불러 들어오게 하였다.    그래서 생강 장수는 정승댁 고대광실 넓은 마당에 들어오게 되었다. 대청 쪽으로 걸어 들어오는 순간, 규수는 낯선 생강 장수를 의식하지 않고 대청 요강에 버젓이 앉아 과감하게 소변을 보았다. 배뇨 소리가 너무나도 크게 들리기에 생강 장수는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오! 오! ‘공곡전성(空谷傳聲)’이로다.”라는 감탄성을 외치고 말았다.    규수는 천자문의 ‘공곡전성’을 잉용하는 생강 장수의 상황인지 능력에 감동하여 자기 어머니에게 ‘저 사람과 결혼할게요.’하고 전격적으로 제안하였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자기가 애지중지 양육하며 특별히 육경까지 배우게 한 외동딸을 생강 장수에게 시집보낼 수는 없어서 일언지하에 거절하니 그 딸은 기어이 결혼하겠다고 고집하기에 그 결의를 꺾을 수 없어서 마침내 예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 총각은 천자문 두 구절 때문에 명문가의 용자가 단아한 규수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으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조실부모하여 비록 생강 장수를 하면서 곤궁하게 살아가고 있으나 양반댁 후예로 영매 준특하게 태어나서 어릴 때 천자문을 배웠다고 한다. 혼례식이 끝나고 일몰의 어둠이 시작될 무렵에 이슬비가 내렸다. 아름답게 꾸며진 신방에 고운 병풍이 둘러 처져 있고, 벽에는 신선이 그려진 그림과 화단에 활짝 핀 꽃에 나비가 날아들고 사슴이 풀을 뜯는 아름다운 그림이 걸려있었다. 주안상이 마련되어 신랑 신부가 서로 권주하며 다감한 사랑의 이벤트(Event)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막상 결혼 초야가 되고 보니, 신부는 마음이 조용하지 않았다. ‘채중개강’과 ‘공곡전성’이라는 두 구절에 반해 결혼을 승낙한 자기의 의사결정이 너무 경솔한 것 같아서 신랑에게 “낭군님은 벽에 그려져 있는 신선의 그림과 화단의 그림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십니까?” 하면서 물어보았다. 질문을 받은 신랑은 마치 면접고사처럼 느껴져서 다소 긴장되었다. 자신감을 가지고 벽에 그려져 있는 두 폭의 그림을 쳐다보니 신선이 그려진 그림은 너무 엄숙한 기분을 들었고, 화단에 꽃이 피어 있고 나비와 사슴이 아름답게 그려진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우리도 신혼생활을 저렇게 즐겁고 아름다우면 좋을 듯하여 화단의 그림이 좋다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들은 신부는 신랑에게 너무 세속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인물인 줄 몰랐다면서, 당신과는 이상이 달라 일생을 함께 살아갈 수 없으니 방을 즉시 나가라고 하였다.    청천벽력 같은 추방의 소리를 들은 신랑은 어쩔 수 없이 신방 금침에 누워보지 못하고 졸지에 방을 나와 담 밑에 쪼그리고 앉아 차가운 밤비를 맞아야 하는 불쌍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약자의 신세를 묵언으로 탄식하고 있을 때, 신부의 숙모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 “모 서방 어찌 여기에 앉아 비를 맞고 있어요?” 하니, 신랑은 즉시 “‘화채선영(畵彩仙靈)’ 할 것을 ‘도사금수(圖寫禽獸)’하였다가 ‘운등치우(雲騰致雨)’ 저문 날에 ‘속이원장(屬耳垣墻)’ 하였나이다.”라고 말했다.    ‘화채선영’, ‘도사금수’, ‘운등치우’, ‘속이원장’ 이들은 천자문에 나오는 문구이다. 신부는 “신선이 그려진 그림이 좋다고 하지 않고 나비가 날고 꽃과 사슴이 있는 그림을 좋다고 하였다가 구름이 날아올라 비가 오는 날에 귀를 담장에 붙이게 되었나이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가 비록 육경을 통달했다고 자부하였으나 천자문만 익힌 신랑의 식견에 미흡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급히 버선발로 뛰어나가 “군자님의 대의를 알지 못한 옹졸한 아녀자를 용서하십시오.”라고 사과한 후 다시 모셔 단란한 결혼 초야를 보냈다는 것이다. 이후 신랑은 신부로부터 역경을 배우고 독공 습독하여 문과에 급제해서 출사한 후 고속 승차하여 불혹의 나이에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는 말씀이었다.    그때는 단지 흥미 있는 스토리로 들렸으나 거기에는 정독과 숙독의 중요성이 함의 되어있었고, 학습 동기의 유발은 물론 학문은 인격의 도야만이 아니라 사회적 상승이동의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며, 천자문 한 권을 숙독해서 생활 장면에 때맞게 재생 잉용할 수 있었던 것은 학습지구력을 가지고 독공 정진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적 의미를 내포한 것이라 사량(思量)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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