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14세 주손으로 태어나 한평생 선비의 길을 걸어온 우산(愚山) 최채량 서예가의 작품 47점을 통해 한 예술가의 삶과 정신을 길어 올린 인문서 '우공이산을 옮기다'가 독자를 초대한다.
 
이 신간은 단순한 서예 작품 해설서가 아니다. 우산 최채량 선생의 90여 년 삶을 한 획 한 획의 글씨 속에서 읽어내는 기록이자 성찰의 여정이다. 
 
저자 이상안은 경북대학교 공학박사이자 경주대학교 전통건축학과 특임교수로 활동해 온 수필가로, 서예를 잘 모르는 독자도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조형적 분석과 역사적 맥락, 고전의 지혜를 아우르며 느림의 미학이 지닌 깊이를 차분히 풀어낸다. 과학자의 이성과 인문학자의 시선을 함께 지닌 그는 우산 선생의 글씨를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읽는’ 작업을 시도했다. 
 
저자는 머리말 '묵향 속으로, 붓끝 따라'에서 “우산 선생의 서예 작품을 마주할 때면 느리고 고요한 시간 속에서 마음의 티끌이 가라앉고 세상의 소음이 멈춘다”고 고백한다. 이 책은 바로 그 느린 시간 속에서 47점의 작품을 하나하나 읽어낸 기록이다.
 
우산 선생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살아 있는 역사다. 생물학을 전공한 과학도로서 자연의 이치를 탐구했고 39년간 교단에 서며 수많은 제자들에게 지식과 인성을 함께 가르쳤다. 동시에 붓을 들어 먹향 속에 정신을 새기며 전통 서예의 맥을 이어온 예술가기도 하다.
 
저자는 이 모든 삶의 궤적을 ‘통섭의 여정’이라 부른다. 과학자의 이성과 예술가의 감성, 교육자의 헌신과 선비의 기개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삶은 과도하게 전문화된 현대 사회에 깊은 울림을 던진다.
 
이 책 제1편 ‘우산 최채량 서예의 향기’에는 '나의 뒷면이 당신의 정면이 될 때', '강 푸르고 꽃 타오르다', '붙잡을 수 없기에 더 소중한', '물처럼 맑게, 대나무처럼 비우게', '성공의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 '고요히 그물을 짜다' 등 서예 작품과 글귀를 중심으로 한 사유의 글들이 수록됐다. 
 
각 장은 하나의 작품에서 출발하지만 단순한 해설에 머물지 않는다. 조형의 구조를 살피고 문장이 지닌 고전적 의미를 짚으며 다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47개의 작품은 47개의 목소리로 독자에게 말을 건넨다.
 
저자는 "우산 선생의 글씨는 아름답지만 화려하지 않다. 요란하지 않지만 깊이가 있고 유려하지 않지만 힘이 있다. 흔히 말하는 ‘졸박의 미학’, 기교를 넘어선 진실함이 그 바탕에 있다"면서 "적수천석, 즉, 물방울이 돌을 뚫듯이 한결같이 이어진 삶의 궤적은 화선지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한 획, 한 획에는 붓질의 호흡이 담기고 먹의 농담에는 세월의 무게가 스며 있으며 여백에는 말없는 웅변이 깃들어 있다"고 전한다.
 
책의 제목 ‘우공이산을 옮기다’ 역시 이러한 선생의 삶의 태도를 상징한다. 저자는 우공이산 고사에서 제목을 가져왔다며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꾸준한 노력으로 결국 이뤄낼 수 있다는 뜻이 우산 선생의 호 ‘우산’과 맞닿아 있다고 설명한다. 평생 한 우물을 판 예술가에 대한 존경이자 느리지만 확실한 변화를 믿는 다짐이기도 하다.
 
제2편 ‘최진립과 용산서원의 역사·문화유산학적 고찰’은 이 책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참전 연구를 비롯해 조선후기 용산서원의 문화전략과 지역사회 통합, 편액 휘호자 고증, 옥동·기별의 충절과 신분 윤리에 대한 재평가가 논문 형식으로 수록됐다. 
 
우산 선생이 주손으로서 간직해 온 가문의 역사와 자부심을 기억한 저자가 학술적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속에서 순절한 이들의 이야기를 강조하며 이름 없는 충절까지 함께 조명한다.
 
권순채 수필가는 이 책 추천사에서 “아흔이 넘은 연세에도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필력을 지닌 우산 최채량 서예가의 일대기를 관찰해 기록으로 남긴 작업은 우리가 본받을 일”이라고 전했다.
 
소설가 배성동 역시 “우산은 삶의 미학을 성찰하고 저자 이상안 박사는 서예를 읽어냈다”며 “이 책은 단순한 서예 해설서가 아니라 47개의 작품이 철학적 깨달음으로 다가와 우산 선생의 삶 전체를 보여준다”고 평했다. 그는 “기교를 넘어선 진실함, 화려하지 않지만 힘 있는 글씨가 우산 선생의 매력”이라며 “AI 시대에 더욱 절실해진 느림의 가치와 정신의 깊이를 일깨우는 책”이라고 덧붙였다.
 
'우공이산을 옮기다'는 서예 전문가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서예를 잘 모르지만 아름다운 것과 깊이 있는 것, 진실한 것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 묵향을 맡으며 잠시 멈출 줄 아는 이들, 느림의 가치를 아는 이들, 한 획에 담긴 한 평생을 존중할 줄 아는 이들에게 이 책은 조용하지만 힘 있게 말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