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이씨(全義李氏)의 시조 이도(李棹)는 충남 공주 출신으로 원래의 이름은 이치(李齒)였다. 고려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징벌코자 남하하여 공주에 이르렀으나 홍수로 금강이 범람하여 진군이 불가능하게 되자 이때 배를 만들어 도강을 도와준 인물이 이치였다. 
 
견훤을 물리친 왕건은 이치의 공로를 높이 사 배의 노라는 뜻으로 도(棹)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벼슬까지 부여하였다. 그런 후 군사요충지인 전의현에 운주산성을 쌓고 이곳에서 살았으니 후손들이 전의(全義)를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선조 때부터 대대로 공주 금강에서 뱃사공으로 일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배삯을 받지 않을 정도로 자비로운 인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루한 승복을 걸친 스님이 와서는 강을 건너자고 하여 건넜지만 그 스님은 배에서 내리지 않고 다시 돌아가자고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수차례 했지만 뱃사공 이씨는 짜증 하나 내지를 않고 스님이 하자는 대로 계속해 주었다. 
 
그러자 그 스님이 크게 감탄하며 말하기를 “과연 소문대로 덕이 많은 분이시구려 하고는, 사공을 보아하니 부모님 상중(喪中)인거 같은데 묘 자리는 보아둔 곳이 있소?” 하고 물었다. 
 
이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3년이 지났으나 아직 묘 자리를 찾지 못해 임시방편으로 집 뒤에 모셔 두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노승은 자기가 자리를 하나 일러줄 터이니 그곳에다 장사지내라고 하는 것이다. 
 
스님이 알려준 자리는 공주 강 북쪽 산 중턱에 있었는데 훗날 반드시 묘를 이장하자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니 파지 못하도록 석회 1천 포를 써서 단단히 묻으라고 일러주고 자기 갈 길을 갔다고 한다. 이 노승은 뱃사공 이 씨의 덕을 시험하면서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하루종일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며 산을 살폈다고 한다.
뱃사공 이 씨는 그곳에다 아버지의 시신을 이장하고 스님이 써준 표석 하나도 같이 묻었으며 많은 석회를 부어 무덤을 단단히 했다고 한다. 이 묘를 쓰고 후손들은 번창하여 부귀를 누렸으며 공주지방의 호족으로 성장하였고 그 중 이치(李齒)는 왕건을 도와 삼한을 통합하는 큰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다. 
 
그런 후 십여 대(代)가 지나서 조선조 광해군 때 명풍수로 이름이 높은 박상희가 찾아와 묘 자리를 보고는 후손들에게 “이 자리는 산 뒤의 맥이 내려오다가 끊겼기 때문에 일시 발복은 했을지 모르나 곧 일족이 멸할 흉지이니 이장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후손들은 유명한 명풍수가 그런 말을 하였기에 이장을 하려고 묘를 팠으나 너무나 단단하여 계속 팔 수가 없었고 겨우 1층을 걷어 내자 그 속에 글씨가 새겨진 표석이 하나 나왔다. 
 
내용인즉, “남래요사 박ㅇㅇ단지일절지사미만대영화지지(南來妖師 朴ㅇㅇ單知一節之死 未萬代榮華之地)”라 하여 남쪽에서 온 지관 박ㅇㅇ는 용맥 1절이 죽은 것만 알고 만대영화지지는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박ㅇㅇ와 후손들은 깜짝 놀랐고 표석의 글귀에 감탄하면서 그대로 다시 묻었다고 전해진다. 이 묘는 충남 세종시 전의면 유천리에 있으며 복호형 명당으로 소문이 나 있어 전국의 풍수가들이 답사지로 빼놓지 않고 가보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