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목령(蟹目嶺)은 경주 남산의 금오산 북쪽 능선 중간 지점에 있는 준령이다. 능선의 두 봉우리가 마치 게(蟹)의 눈(目)처럼 생겼다고 하여 유래된 지명이며, 해목은 게의 눈이다. 금오산(494m)의 서쪽 귀호 들녘에서 해목령을 바라보면 능선에 튀어나온 두 개의 봉우리가 원경이긴 하지만 선명한 게의 두 눈 형상을 하고 있어서 해목령으로 명명되어 불러오고 있다.    해목령에는 게눈 바위, 용 바위, 거북 바위, 물개 바위, 선각기호 바위 등 여러 형상의 기묘한 바위가 있고, 또 산마루에 약수터가 있어서 청정한 약수를 마시면 등산 갈증을 해소할 수 있기에 의미 깊은 명소라 생각된다. 이 해목령에는 신라 제55대 경애왕이 훙(薨)하여 경순왕은 전왕의 시체를 서당에 모시고 군신과 통곡한 후 시호를 올리어 경애라 하고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擧前王屍殯於西堂 與群下慟哭 上諱曰景哀 葬南山蟹目嶺...)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명기되어 있어서 사적지(史蹟地)이기도 하다. 지금은 경애왕릉이 경주시 배동에 있다. 경애왕은 휘가 위응이고 제54대 경명왕의 동모제(諱魏膺景明王同母弟也) 아버지는 제53대 신덕왕이다, 해목령에서 서북쪽 방향으로 약 300m 거리에 일성왕릉이 있고, 더 북쪽으로 가면 산의 모습이 자라(鰲: 자라 오)가 고개를 들고 두 다리는 펴서 계곡으로 내려가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경주 남산을 금오산(金鰲山)으로 이름 지은 것은 이 묘하게 생긴 자라등(鰲嶝) 때문이라고 한다. 이 자라 목에 어련문중(魚淵門中) 출신으로 충암공 김귀일(金貴一)의 배위인 증(贈)정경부인 언양김씨의 산소가 있다. 그래서 이 산소를 일명 ‘자라등산소’라 부르기도 한다. 충암공은 조선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도사를 역임하면서 북방을 지켰다. 문무가 겸전하여 지략이 뛰어났으며 이시애란에 종군 명을 받고 차운혁 손소 김관 등과 참전하여 평정에 공을 세웠다. 그 적개공훈 2등으로 가선대부 행밀양도호부사를 제수받고 사후에 성종이 관리를 보내 치상 한 후 자헌대부 병조판서의 증직과 사패지(賜牌地) 요광원 사방 십리와 상여(喪輿)가 하사되었다. 이 자라의 머리에는 경주최씨 배반문중의 최삼택(崔三宅)공에게 적(適)한 충암공 김귀일 손녀 경주김씨의 산소가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곳 명당에 장사 지내고 후손으로 사헌부감찰 최경천, 참판 최봉천, 진사 최병천 삼형제와 현감 육의당 최계종과 그의 손자 팔형제가 태어나서 모두가 출중하여 배반문중이 번성하였다고 전해온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살았던 상서장 주차장에 주차해 놓고 남쪽 능선을 올라가면 동쪽에 옥룡암 암자와 자라등(鰲嶝)이 보이고 해목령에서 청정한 산상 약수를 한 모금 마시고 팔각 금오정(金鰲亭)을 지나 고위봉까지 가면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하다.    그래서 이곳 산길은 경관이 아름답고 유적이 많아서 사철 경향 각처의 등반객이 찾는 유서 깊은 곳이다. 그래서 비록 한즙(汗汁)을 흘리긴 했으나 청풍에 귀 씻고 일망우제(一望無際)의 산상에서 ‘해목령 힘찬 애국의 눈빛’라 제(題)하여 시 한 수를 읊어 보았다. 금오산 정상에 해 뜨면 햇살에 비친 눈매는 천공(天空)의 구름을 향해 웃고 서산 일몰의 미광(美光)이 밤 꿈을 가불(假拂)하면 천년의 향수는 베개 머리에 쏟아지는 그리움이던가 세찬 바람이 불어가고 폭우가 퍼부어도 항시 애국의 힘찬 눈빛 파수꾼 되어 지키는데 창림사 오솔길에 그리움은 봄날의 남기(嵐氣)되어 해목령을 오르네 고위봉을 거쳐 오는 지기(地氣)가 다감한 정 되어 가슴에 쓰며드는 데 해목령은 오늘도 은하수에 눈 씻고 열애(熱愛)의 뜨거운 그리움 주네. 경애왕(景哀王, 신라 제55대) 역시 박(朴) 씨 성을 지닌 군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2권 등에 의하면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이던 중 후백제 견훤의 기습을 받아 자결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왕이다.    현재 ‘경애왕릉’으로 표기된 무덤은 경주시 배동 산73-1번지, 삼릉계곡 일대에 있다. 이곳은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무덤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며, 위치상 해목령에서 약 1.3㎞가량 떨어진 지점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포석정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왕의 시신을 해목령까지 옮긴 뒤, 다시 약 1.3㎞ 떨어진 삼릉 근처 까지 운구해 안장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경애왕이 사망한 927년은 후삼국의 전란이 본격화된 시기였다. 후백제의 침입으로 국운이 기울던 혼란 속에서, 왕의 시신을 먼 거리까지 운구해 장사지낼 여유가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반면, 현재 ‘일성왕릉’으로 전해지는 무덤은 해목령에서 불과 250~300m 정도 떨어진 능선 아래 자락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을 고려할 때, ‘일성왕릉’으로 알려진 이 무덤의 주인은 경애왕의 무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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