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모임에 참석하기가 왠지 꺼려진다. 서너 명만 모여도 점차 흐릿해 지는 기억력, 혹은 죽음에 관한 화제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서이다. 하긴 이런 대화를 나눌 연령에 이른 것은 사실이다. 또한 필자도 저네들이 두려워하는 기억력 상실 이야기에도 공감이 가긴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왠지 이런 말들 앞에선 귀를 닫고 싶다.
  젊어서는 친구 집 전화번호를 30여 개씩 외웠기 때문이다. 또한 독서 시 책 내용을 읽으면 좀체 잊히지 않았잖은가. 이와 달리 요즘은 책 읽고 돌아서면 내용을 쉽사리 떠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친구 명희는 갑자기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놓고는 상대방 이름이 퍼뜩 안 떠올라 애 먹었다는 말을 해온다. 또 다른 친구는 야채 가게에 가서 어느 채소 명칭이 안 떠올라 한동안 머뭇거렸다는 경험담도 털어놓곤 한다.
점차 희미해지는 기억력을 나이 탓으로 여기기엔 왠지 서럽다. ‘벌써 내가 이렇게 됐나?’ 무심히 흐르는 세월이 요즘따라 야속하고, 한편 시간을 덧없이 보내는 게 아깝기도 하다. 그래서인가. 이젠 하루 24 시간을 잠자는 시간 제외하고는 단 일초도 허투루 보내선 안 된다는 경각심마저 생긴다.
며칠 전에는 겨우내 먹어온 김장 김치에 신물이 났나 보다. 갑자기 햇김치가 먹고 싶었다. 동네 마트에 가서 열무 한 단과 얼가리 배추 한 단을 사서 김치를 담갔다. 김치를 버무릴 때 친구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다소 늦게 전화를 받자, “뭐하느냐?”라고 대뜸 물어온다. 그래서 김치 담그는 중이라고 답하자 벌써 김장 김치를 다 먹었느냐고 묻는다. 그게 아니라 햇김치가 먹고 싶어서 담그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곤 이 김치를 담가서 결혼한 딸에게도 보낼 작정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힘들게 딸네 김치까지 담가 주느냐? 사먹으라고 하지”라고 한다.
이 말에 김치 담글 힘이라도 있을 때 부지런히 자식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싶다고 하였다. 사실이 그러했다.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어느 누구도 호언장담할 수 없잖은가. 특히 죽음의 그림자는 늘 우리 곁을 배회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최재선 수필가는 그의 글 「삶과 죽음의 촌수」에서, “ 삶만큼 중요한 게 죽음이다. 우리는 잘 사는 법만 배웠지, 잘 죽는 길에 대해서는 이정표를 본 적이 없다. 학교는 물론이고 노인 복지관 같은 기관에서도 당사자인 노인을 대상으로 죽음에 대해 꺼내는 걸 꺼린다. 특히 가정에서 죽음을 공론화 하면 부모가 상처를 깊게 받을 수 있다. 이래저래 죽음에 관해 이야기 하는 건 시한폭탄을 건드리는 것과 같다.”라고 표현했을까.
  최재선 작가 말에 수긍이 간다. 누구에게나 다가올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임에도 애써 이를 회피 하거나 죽음에 대하여 논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피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누구인들 죽음을 피할 수 있으랴. 불로장생을 원했던 중국의 진시황도 겨우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렇듯 죽음은 누구나 맞는다. 죽음은 악(惡)이나 벌(罰)은 결코 아니다. 죽음은 오랜 인생 여정 끝의 귀향(歸鄕)이나 다름없다.
현대인들은 평소 열심히 운동을 하고 몸에 좋다는 음식과 약 등을 복용하며 가급적 저속 노화 및 건강을 지키려고 안간힘 쓴다. 하지만 아무리 100세 시대를 향하여 노력을 하지만 타고난 인체 시계는 거역할 수 없는 듯하다.
  밤새 안녕이라고 젊은 3, 40대에서도 돌연사가 발생 하는 것을 보면 인생살이가 한낱 뜬구름에 불과하다는 비관적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인가. 하루 한시가 금쪽같다는 생각이다. 젊었을 때는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지루해 했었다. 요즘 시간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아서인가. 눈만 뜨면 일주일이 바람처럼 지나간다.
이제 뒤늦게 철이 드나 보다. 그래서인지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소중하다. 전과 달리 타인의 허물에도 관대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요즘은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할 시간에 용서와 사랑을 베푸는 일에 더 시간을 할애 하려고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