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작은 팝송 단톡방에 들어가 있다. 그곳에서는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음악을 매개로 매 시간 감성과 기억이 조용히 오간다. 누군가는 노래를 올리고, 누군가는 그 노래에 얽힌 사소한 장면을 적어 놓는다. 흥얼거리며 감상하다 침묵한다. 그렇게 사건과 기록과 시간이 쌓여 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간들은 필자를 조금씩 긍정하는 삶으로 이끌고 편안하게 만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지금 즐겁고 행복하다. 음악을 듣고 연주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취미활동을 넘어선 의미를 준다. 그것은 필자가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세계와 관계 맺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은 파형이 만들어 낸 울림으로 공간과 시간 속으로 흐르는 예술이다. 이 울림은 무의식 깊은 곳과 현실 세계를 동시에 흔든다. 혼자 헤드폰을 끼고 있을 때에도, 필자는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리듬과 호흡에 몸을 맞추고 있다. 이렇게 음악은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서 희·노·애·락을 위해 존재한다. 음악이 영혼을 조율한다고 플라톤은 말했다. 이 말은 내면을 정의롭고 조화로운 상태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영혼을 악기(리라)나 조화로운 음악에 비유하며, 이성(reason)이 기개(spirit)와 욕망(desire)을 잘 다스려 ‘영혼이 하모니’를 이루는 이상적인 상태를 말하고 있다. 공자 또한 음악을 통해 인간과 사회가 조화를 이룬다고 봤다. 이 사유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음악을 듣다 보면 마음이 흩어졌다가 다시 정돈되는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음악은 또한 억압된 무의식이 가장 부드러운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통로다. 말로 꺼내기엔 거칠고 무거운 감정들이 리듬과 화성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불안, 상실, 그리움, 설명할 수 없는 욕망들이 음악으로 바뀌어 울려올 때, 이들을 견딜 수 있게 만든다. 음악은 상처를 없애주지는 않지만,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캉이 말했듯 음악은 결핍을 둘러싼 상징계와 상상계 틈새를 잠시 봉합해 준다. 연주한다는 것은 완전해지려는 시도가 아니라, 닿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손을 뻗는 행위에 가깝다. 이렇게 불가능한 시도 자체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음악 속에서 우리는 균열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그 균열을 울림으로 바꾼다. 때문에 음악은 치유라기보다 동행에 가깝다. 음악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것을 몸은 먼저 알고 있다. 소리가 뇌에 닿을 때 보상 회로가 활성화되고, 도파민이 분비된다고 한다. 기쁨과 안도, 다시 살아갈 의욕이 살아나고, 우울하고 불안할 때 음악은 필자를 대신해 감정을 조절해 준다. 연주에 몰입하는 순간, 시간은 느슨해지고 필자는 필자 자신에게 다시 집중하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몰입에 대한 경험은 삶이 아직 충분히 살아볼 만하다는 생각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개인적인 안정은 곧 관계로 확장된다. 민요와 찬송가, 혁명가처럼 음악은 언제나 공동체 기억을 품어 왔다. 함께 부르는 노래는 서로 다른 삶을 잠시 리듬 안에 묶는다. 콘서트장에서, 합주실에서, 혹은 작은 단톡방에서조차 음악은 우리를 연결한다. 같은 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 사이에는 설명할 수 없는 친밀감이 생기는 이유이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음악과 함께 살아왔다. 언어가 정교해지기 전, 사람들은 박자와 소리로 서로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노동과 제의, 전쟁과 치유 순간마다 음악은 중심에 있었다. 노래하고 북을 두드리는 행위는 집단이 여기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신호였고, 동시에 일상을 넘어서는 문이었다. 음악은 생존 기술이자 초월에 대한 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음악을 듣고 연주하며 살아가는 삶은 단순히 소리를 즐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영혼을 조율하고, 무의식에 내재하는 폭력성과 불안을 가라앉히며, 필자와 타인을 잇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음악은 태초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주는 언어이다. 음악이라는 언어와 함께 하루를 살아간다면, 그 삶은 행복한 삶이라 생각한다. 행복함으로 기울지 않는 편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