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각은 필자를 가장 먼저 감싸는 세계였다. 봄날, 연둣빛 잎사귀가 부드럽게 바람에 떨며 흔들거릴 때, 필자는 대지 상상력에 필자 자신을 단단히 붙잡아 두어야 했다. 
 
그러나 꿈속에서 부드러운 촉각은 달랐다. 꿈을 깨고 나면 매끄럽고 포근한 결만 남아 있었다. 거친 나무껍질, 바람 속 먼지, 숨겨진 모서리, 모든 것은 철저히 가려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위선이 봄 햇살처럼 살결 위를 스쳐 갔지만, 손끝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시각은 여름 강물처럼 멀리서 나를 유혹했다. 인간은 본래 보기를 좋아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지만, 그 말은 단순한 찬미가 아니었다. 여름날 강변을 거닐며, 필자는 더 많은 풍경을 눈에 담고 싶어졌다. 
 
햇빛에 반짝이는 수면, 멀리 번지는 안개, 그러나 본다는 것은 언제나 착각을 불러온다. 눈은 모든 것을 보는 듯하지만, 실은 필자가 보고 싶은 물결만 비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눈에 대한 탐욕’이라 불렀던 것, 바로 그 욕망 속에서 필자는 수없이 미끄러졌다.
가을이 오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의미가 달라진다. 황혼 속 은빛 안개는 풍경을 흐릿하게 덮는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 하데스 투구와 기고스 반지는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누군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을. 하데스 투구는 보이지 않게 만드는 투구이다. 전쟁에서 은밀히 움직이기 위해, 혹은 위험한 추격을 피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신이나 영웅이 이 투구를 쓸 때, 그 목적은 대체로 ‘전략’과 ‘생존’에 있었다. 반면, 기고스 반지는 플라톤, 『국가』에서 등장한다. 이 반지를 낀 자는 완전히 투명해져, 어떤 행동을 해도 들키지 않는다. 플라톤은 묻는다. “그런 힘을 쥔 자가, 과연 정의로울 수 있는가?”
하데스 투구와 기고스 반지는 같은 ‘투명성’을 지녔지만, 그 쓰임과 의미는 다르다. 투구는 전투 기술이자 방패였지만, 반지는 인간 도덕성을 시험하는 무기였다. 전자가 생존을 위한 장치라면, 후자는 유혹을 위한 장치였다. 가면을 쓰고 있는 시간과 맨얼굴로 서 있는 시간 중, 어느 쪽이 진짜 나일까. 보이지 않는다는 건, 자유일까? 아니면 유혹일까? 대답은,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 손끝에서 이미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데스 투구와 기고스 반지는 그 주인을 그림자 속으로 숨겨준다. 시선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인간은 변한다. 누군가는 자유를, 누군가는 방종을 택한다. 통화녹음 속 목소리가 드러낸 거짓과 위선은, 바로 안개 속에서 길러진 일임을 경험했다.
찬바람 불어오는 겨울 거리는 가까움이 진실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가르쳐주었다. 차가운 손을 잡으며 느낀 온기는 진실에 대한 온도일 수 없었다. 가까울수록, 우리는 부드러운 껍질로 서로를 감쌌다. 그 속에서 날카로운 마음은 눈밭 아래 숨은 얼음처럼 조용히 숨어 있었다. 사랑, 신뢰, 믿음,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묻힌 적대감을 몰래 키워갔던 위선이 통화녹음에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경험했던 것이다.
문학 속 인물들도 계절을 걸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피 묻은 손을 바라보았지만, 그 붉음을 끝까지 보지 않았다. 아셴바흐는 소년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는 순간, 자신을 잃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마지막까지 깨닫지 못했다.
세상은 시선과 촉각 사이 불균형 위에 세워져 있다. 시각은 멀리 있는 것을 가져오지만, 촉각은 가까운 것을 안겨준다. 그러나 둘 다 완전하지 않다. 봄이 오면 올라오는 부드러운 잎사귀도, 여름 반짝이는 강물도, 가을 은빛 안개도, 겨울 차가운 온기도 진실을 끝까지 전해주지 않는다.
필자는 이제 감각이 주는 확신을 믿지 않는다. 보는 것은 늘 위(僞 거짓)이고, 만지는 것은 늘 변명한다. 정의가 빛 속에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지켜져야 한다면, 감각이 휘두르는 장난에 휘둘리지 않는 길은 하나뿐이다.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잡히지 않는 순간에도, 스스로 지키는 일. 그것이 필자가 계절과 감각에 대한 불완전함을 스스로 품고 살아가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