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의 젖니 같은 연둣빛 새싹이 나뭇가지마다 움트는 3월이다. 희망찬 새봄을 맞이하자, 몸과 마음이 부쩍 바빠졌다. 다름 아닌 며칠 후면 평소 그토록 비혼(非婚) 주의를 고집하던 막내딸이 드디어 결혼을 해서이다. 작년 이 맘 때 쯤 어느 날 일이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막내딸은 한동안 필자 앞에서 쭈삣거리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어 결혼 상대자 이야기를 꺼냈다. 결혼 이야기만 꺼내면 펄쩍 뛰던 딸인지라, 이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이 때 장차 사위 될 인물에 관하여 가장 먼저 딸아이에게 질문 한게 있다. 다름 아닌 성격과 인성이었다. 딸 말에 의하면 장래가 촉망되는 직장은 물론, 무엇보다 삶의 지향점이 확실하고 사고방식이 건전하다고 했다. 경제관념도 뚜렷하고 성실한 면에 반하여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딸의 이 말에 필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상대방의 부모님까지도 훗날 모실 각오가 설만큼 그 사람을 사랑하느냐?” 라고 말이다. 그러자 딸아인 망설임 없이, 만약 결혼 상대자의 부모님이 노후에 함께 살 의향을 비친다면 모시며 살겠단다. 이 말에 “ 그렇다면 결혼해라.” 라고 흔쾌이 딸아이 결혼을 허락 했다. 사실 요즘 젊은이들, “시부모를 모시고 살 수 있나?” 라고 묻는다면 고개를 가로 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딸은 선뜻 시부모님을 모실 수 있노라고 자신 있게 답했다. 이 말 이면엔 어떤 역경과 고초도 감내 할 만큼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의미가 내재돼 있기에 부모로서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두 사람이 결혼을 생각하기까진 이런 각오가 마음 밑바탕에 자리해야 한다는 지론에 의해서이기도 했다. 한편으론 향후 시부모를 모실 수 있다는 딸아이 생각이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현대 젊은 여성들은 결혼 상대자를 고를 때 계산기부터 두드리는 게 사실 아니던가. 상대방을 향한 진심어린 사랑보다 앞서는 게 조건이어서 일까? 외모는 꽃미남이어야 하고, 대기업에 다니며 신혼살림을 차릴 수 있는 아파트는 필수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하긴 가난하면 사랑도 창문으로 도망가기에 경제적으로 안정된 직장과 집 마련이 된 결혼 상대자를 찾는 것은 인지상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의 개인적 생각은 이러하다. 기나긴 세월 속 결혼 생활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꼽을 것은 반듯한 인성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고 얼굴이 잘 생겼어도 언행이 삐뚤어졌다면 결혼 생활은 불행의 연속일 듯해서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어느 한 사람 만의 희생과 헌신만으론 행복한 삶을 영위 할 수 없다. 오죽하면 일본의 유명한 종교가인 우찌마라 간조(內村鑑三) 는 이런 말까지 했을까. “ 가정은 일본인 대다수에게는 행복한 장소가 아니고, 인내의 장소다.” 라고 말이다. 우찌마라 간조의 이 말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이 아니던가. 예전엔 남성들이 권위주의의 갑옷으로 무장돼 있어서 여성은 그것이 드리운 그늘에서 좀체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현대는 양성평등 시대이다. 여성들은 예전의 굴레와 속박에서 헤어나와서 자아를 실현하고 인격과 인권을 부르짖고 있다. 하지만 여자는 배우자인 남편을 잘 만나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배우자를 잘못 만나서 불행과 인생 파멸을 맞은 여성들도 얼마나 많은가. 이를 두고 프랑스 소설가 발자끄(1799-1850)는, “인간의 지식 중에서 가장 뒤떨어진 지식은 결혼에 관한 지식이다.” 라는 말로 결혼의 모순과 오류를 지적 했다. 이로보아 배우자는 서로 잘 만나야 한다. 남성도 매한가지 아닌가. “현처(賢妻) 는 일생의 풍작(豐作)이요, 악처는 일생의 흉작(凶作)이다.” 라는 말만 미뤄 봐도 좋은 아내를 만나는 것처럼 최고의 행운은 없을 것이다. 어느 가정이든 현모양처의 역할은 지대하다. 자녀 교육만 해도 그러하다. 훌륭한 위인 뒤엔 항상 훌륭한 어머니가 존재 했다. 이렇듯 행복한 결혼 생활은 서로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한다. 아직 세상 물정에 어둡고 매사 미숙한 딸아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평생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지혜롭게 삶을 산다면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이 꾸려지리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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