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개관 후 지금 이렇게 훌륭하게 운영되는 상황도 사실 기적 같죠. 앞으로도 많은 분들이 와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봄볕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고청기념관. 고청옛집 한켠에서 고청의 그림을 정리하던 고청기념관 윤석빈 신임 관장(54)은 잠시 손을 멈추고 이렇게 말했다. 지난 23일 만난 그의 말투는 담담하고 고요했지만 세대를 건너 이어온 예술인의 무게와 책임이 스며 있었다.영원한 신라인이자 문화인이었던 고청 윤경렬(1916∼1999), 그리고 그의 아들 우경 윤광주(1945~2021). 경주의 한 세기를 이끌었던 문화역사운동가로서 문화유산 복원과 재현의 길을 개척해온 두 예술가의 뒤를 잇는 세 번째 손길이 바로 고청의 손자 윤석빈 관장이다. 그는 현재 계승을 넘어 고청과 우경의 유산을 ‘다시 살려내는’ 작업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윤 관장은 스스로를 “평생 만드는 일만 해온 사람”이라고 말했다. 전시 유물 복제와 모형 제작, 3D 프린팅까지...,그의 손은 늘 무언가를 만들어왔다.“경영이나 운영 쪽은 사실 경험이 없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작품을 이어간다는 입장에서 보면 지금으로서는 제가 해야 할 일인 것 같아요. 그 일을 할 사람이 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의 말은 담백했지만 단호했다. 유업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생래적으로 ‘마주했다’는 표현이 더 가까웠다. 현재 고청기념관은 생활관과 기념관으로 체제를 이원화하며 전문성을 강화하는 전환기에 있다. 그는 동생 윤재빈 씨와 함께 ‘고청의 작품을 되살리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저는 수공으로밖에 할 수 없는 작업을 맡고 있습니다. 거의 매 주말마다 와서 할아버지 옛 작품들을 하나하나 매만지면서 복원하고 있습니다”아직 전시되지 못한 인형, 유품들이 쌓여 있다는 그는 “전시된 작품 외에도 틀이나 자료는 대부분 제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인형을 재현할 수 있는 틀도 그대로 남아 있고요. 그런데 훼손이 너무 많이 됐습니다”고 말하면서 훼손된 유물들에는 다시 숨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리를 하다 보면 다시 살려야 할 것들이 계속 나옵니다. 복원할 수 있는 건 복원하고 아예 없는 건 처음부터 다시 찍어서 구워야 합니다. 그러나 단시간에 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유업을 잇는 일은 언제나 자부심과 부담을 동시에 품는다. 윤 관장 역시 그 경계 위에 서 있었다.“두 분이 자랑스러운 마음은 항상 있습니다. 그런데 죄송한 마음이 더 큽니다” 그는 웃으며 말했지만 곡진한 진심이 묻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만들어 놓은 길이 워낙 크다 보니, 따라가는 게 쉽지 않죠. 그래도 많은 가르침을 주셔서 그 가르침대로 운영하려고 합니다”인터뷰 도중, 그는 문득 오래된 기억 하나를 꺼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을 때 고청 선생이 건넸던 말이라고 했다.“'세상은 톱니바퀴처럼 돌아간다. 농부는 농사를 짓고 공장 사람은 일을 하고…,각자 역할이 있다. 그런데 예술가는 그 톱니에 낄 수가 없다. 예술가는 처절하게 자신을 단련해서 그 톱니들이 잘 돌아가도록 하는 윤활유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표현의 기술일 뿐이지 모든 예술가의 목적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정신적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하셨죠” “그게 예술가의 존재 이유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라며 할아버지 고청을 그리워하듯 눈물을 훔쳤다. 고청기념관의 전시는 최근 새로운 방향으로 재편됐다. 단순히 작품을 나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고청 선생의 생애 주기를 따라가는 ‘시간의 전시’로 바뀌었다.고청이 일본 유학 시절부터 개성, 경주, 남산에 집중한 여정과 우경의 기억 공간까지, 한 인간이자 예술가로서의 삶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국립경주박물관에 이어 최근 울산문화재연구원에서 전시장 장비를 지원해 주면서 디스플레이를 새롭게 정비했습니다. 작품과 함께 할아버지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앞으로의 계획도 조심스럽게 밝혔다.“작품 정리가 어느 정도 되면 교체 전시도 하고 업그레이드도 할 생각입니다. 지금은 일단 작품과 자료 등을 하나라도 더 살려내는 게 먼저입니다”윤 관장은 예술과 문화유산을 통해 배우고 나누는 공간이라는 고청기념관의 건립 취지와 정신을 완전히 같은 방식은 아니더라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그 취지는 계속 이어갈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방식은 달라질 수 있겠죠. 중요한 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인터뷰를 마치고 고청기념관을 함께 둘러보는 동안, 고청과 우경 선생의 작품들이 조용히 이야기를 건네는듯했다. 그 공간에서 이뤄질 윤석빈 관장의 손길은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행보겠지만 과거와 현재를 잇는 또 하나의 자취가 될 것으로 보였다.   윤석빈 관장은 동아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중앙박물관 백제대향로(컬러), 경주엑스포 석굴암본존조각 구박물관, 경주읍성축소모형 외 전시모형, 월정사 조선실록사고축소모형 등이 있다. 1991년 말부터 복제,전시모형 일을 시작해 지금에 이른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