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사로운 햇볕에 봄기운이 완연한 천년고도에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국내외 관광객들과 시민들이 봄의 정취를 만끽하기 위해 벚꽃 거리를 찾고 있다. 벚꽃 만발로 그야말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건만 나들이객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아 보인다. 상춘객들과 시민들의 어두운 표정은 고유가와 고물가로 인하여 우리 살림살이를 우울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작금의 국제 정세가 불안을 더해주고 있다.    미국, 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이 전면전의 문턱을 넘나들며 격화되고 있고 전 세계 경제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 유가는 치솟고, 나프타, 비료 등 원자재 수급난은 산업의 근간을 흔들며, 불확실성에 짓눌린 증시는 맥을 못 추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란 의회가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가는 선박들로 부터의 통행료를 징수하는 법안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란 타스님 뉴스는 이란이 이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선박당 200만 달러(약 30억원)의 통행료를 부과하면 연간 1000억 달러(약 150조 원) 이상의 수입이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이미 이란이 해협을 통과하는 일부 상선에 통행료를 부과하기 시작했다는 보도도 있다. 지금 우리가 목도 하는 것은 단순히 특정 국가 간 분쟁을 넘어서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가 쌓아 올린 ‘국제법 기반의 질서(Rules-based Order)’가 해체되는 과정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통해 영토 보전과 주권 존중의 원칙이 무너졌고, 베네수엘라 사태를 통해 국내 문제 불간섭 원칙이 강대국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재해석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제 호르무즈 해협의 갈등은 공해 항행의 자유라는 원칙마저 힘의 논리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제법 기본원칙들이 뭉개진 자리에 남은 것은 날것 그대로의 ‘힘’이다. 법적 논리보다 미사일 사거리와 경제적 보복 수단이 국가 간 대화의 주된 언어가 되는 이른바 ‘국제법 실종 시대’인 것이다.    국제법이 약소국을 보호하고 강대국을 절제시키는 기능을 상실할 때, 국제사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홉스적 자연상태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먹구름이 걷히면 다시 햇살이 비치겠지만, 한번 무너진 국제법의 권위를 복원하는 데는 수십년 혹은 수 백년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이란이 세계 원유 수송의 동맥인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선박들에 거액의 통행료를 물리는 것은 국제 해양 질서의 대원칙인 ‘통과 통항권’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다. 국제 정세가 안정되지 않는 한 벚꽃 피는 계절에도 국민의 불안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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