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감포는 당시 어떤 모습이었을까.” 한신대학교 일본학과 오미정 교수의 ‘루트’(route)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는 “시인들이 고향을 노래하는 것은 제임스 클리포드가 지적한 것처럼, 그것이 나의 루트(root, 뿌리)를 찾는 것이자, 나의 루트(route, 경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며 “고향은 우리의 기억과 흔적들이 축적된 뿌리이자, 지금 여기 나의 삶의 경로를 알려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역사 전공자가 아닌 ‘일본문학’을 연구하던 오 교수가 감포의 근대사에 깊이 빠져들게 된 것은 식민지 시기 조선에서 태어나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간 작가들을 연구하면서부터다. 작은 호기심이 곧 방대한 역사적 발굴로 이어졌고, 그의 저서 ‘감포의 그때 그 일본인들’ 연재가 시작됐다.
 
오 교수의 기억 속 고향은 편도 1시간 거리를 걸어 감포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오가며 가족이 일군 사과밭이 있던 정겨운 곳이다.
 
1983년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감포에서 지냈던 그는 지금의 감포 해국길 뒷길에 있는 이른바 '점빵(가게)' 건물들이나, 다방에 있던 아치형 터널, 심지어 화장터까지 모두 일본인 중심의 거주지 흔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할머니께서 평소 동네 사람을 '사이상'이라고 일본식으로 부르던 기억도 난다”고 전했다. 당시 최씨 성은 일본식으로 ‘사이상’이라 불렀다.
 
◆ 벼루함에서 발견한 상흔, 고향의 '루트'를 좇다
 
2019년 여름, 감포 고향 집에서 발견한 오래된 벼루함에서 일제 식민지의 상흔을 발견했다. 그는 내 가족의 역사에 식민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직접 목도한 것은 처음이어서, 순간 전율이 일었다고 한다. 오 교수가 발견한 벼루함에는 창씨개명의 이름이 어지러이 새겨져 있었다.
 
지난해 일본 시코쿠 가가와현을 답사한 그는 코로나19 기간 국사편찬위원회 등 국내 아카이브를 통해 당시 일본어 신문(부산일보 등) 자료를 샅샅이 뒤졌다. ‘감포’라는 키워드로 검색하자 지역 규모에 비해 월등히 많은 기사가 쏟아졌다. 당시 감포가 일본인들에게 이른바 ‘일확천금을 노리는 노다지’였음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오 교수가 우연히 발견한 일본어 신문 ‘부산일보’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일본어 신문에는 일본인들이 집단 이주한 감포에 대한 기사가 자주 등장했다.
 
‘감포’라는 색인어만으로도 610여 건이 검색됐다. 같은 기간 동아일보에 120건이 검색되는 것과 비교해도 큰 차이를 보여준다. 이 점은 감포가 주요한 일본인 거주지 중 하나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 노다지 좇아 밀려든 일본인들…감포의 '골드러시'
 
오 교수는 “당시 가가와현은 농업이 힘들어지고 삼치잡이도 어려워지자, 영세 어민들을 살리기 위해 국가 및 조합 차원에서 계획적으로 집단 이주를 시킨 것”이라며 “처음엔 개별 이주였지만 1910년대 후반부터는 집단 이주가 이뤄졌고 이후 자본력을 갖춘 운반선과 결합해 동해안의 어업을 장악해 나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당시 조선은 무동력 목선을 썼지만 일본은 석유를 쓰는 기선을 끌고 왔으니 애초에 경쟁이 될 수 없었다”고 전했다.
 
여기에 도쿠시마현 출신 도이구치는 ‘일본인의 감포’를 만든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1927년 12월 4일 도이구치 송덕비가 신사 경내에 세워졌고 해방 이후 감포 읍민들이 도이구치 송덕비를 파괴했다. 이후 남은 흔적에 산당이 생겼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흥미로운 대목은 부산일보 1915년 5월 15일자 기사에 고등어가 2775마리나 잡혀 호황이라고 돼 있는데, 도이구치는 이 무렵 선어 운반업을 시작한 것이다. 1932년 7월 9일(1932년 7월 12일자 부산일보) 감포에 처음으로 상설야구장을 건설한 것도 도이구치였다. 도이구치는 1940~41년 감포읍장을 역임했다.
 
◆ 지도에서 지워진 조선인 거주지, 일본인들만의 공간
 
일본에서 제작된 ‘대직업별명세도 조선남부’(1930)라는 식민지 시기 감포 시가지도에서도 이를 증명하고 있다. 오 교수는 “감포는 일본인 동네라고 알고 있었지만 내가 아는 그 지역이 전부 일본어로 된 도로명과 인명으로 가득했다”며 “조선인 구역이 따로 옹색하게 표기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를테면 지도에는 시가지의 가장 변두리 북쪽과 남쪽에 두 군데 기재돼 있다. 인구가 훨씬 많은 조선인들의 거주 지역이 있음에도 지도에서는 이주 일본인들이 집중된 감포 시가지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고 조선인의 거주지는 비가시화돼 있었다.
 
오 교수의 저서에 따르면 감포에 일본인 마을은 1905년 처음 설치됐고 1914년 모두 5가구로 남자 5명, 여자 7명 등 모두 12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1917년 후쿠이 어업단이 집단이민을 오면서 인구가 늘기 시작해 1920년대에는 상황이 일변했다.
대량으로 어획되는 물고기 덕분에 밀려드는 일본인과 조선인들로 1930년대 감포는 골드러시를 맞았다.
젠쇼의 ‘생활상태조사-경주군’에서 읍면별 호구를 참조하면 1914년부터 1929년까지 15년간 감포리 인구는 118가구에서 719가구로 6배 가까이 늘었다. 감포항 주위로 일본인들의 증가 추세를 확연하게 알 수 있다. 감포리의 719가구를 다시 세분화하면 일본인 196가구 742명, 조선인 518가구 2130명이다. 이는 양남 하서의 일본인이 7가구 30명, 조선인 192가구 1121명인 것에 비하면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일본어보급조사(젠쇼, 1931년)에 따르면 경주군 내에서 일본어를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자가 감포가 포함된 양북면(조금 이해하는 자 621명, 보통 회화에 지장이 없는 자 717명)이 월등히 높았다. 1931년 양북면에 일본인이 918명, 조선인이 2만1056명이 거주했다. 그중 1338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일본어를 알고 있었다는 집계다.
 
오 교수는 “당시 감포는 가히 일본인, 그들만의 공간이었음을 증명한다”며 “감포의 근대사는 분명 뼈아픈 '수탈의 역사'가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랑스럽지 않으니 기억에서 지워버리자고 방치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또 “그 시기 일본인들이 와서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조선인과 어떻게 교류(혹은 충돌)하며 그 공간을 만들어냈는지 그 '식민지의 흔적'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며 “그것은 지워야 할 흔적이 아니라 남겨서 정확한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기록”이라고 거듭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