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빛이 창을 타고 들어오던 순간, 필자는 한 영상을 보았다. 두 팔이 없는 젊은 여성이 발가락으로 가방을 어깨에 메고, 립스틱을 바르고, 부모 입에 음식을 건네고, 아기 기저귀를 갈며 웃고 있었다. 표정은 환했고 동작은 익숙했다. 불편을 견디는 표정이 아니라, 이미 삶과 화해한 얼굴이었다. 화면을 닫고도 눈가가 마르지 않았다.
 
그 장면은 신화 한 장면처럼 다가왔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인간에게 건넨 뒤 끝없는 형벌을 견디듯, 결핍은 때로 형벌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신화를 떠올리면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헤파이스토스는 절름발이 신이었다. 그는 불완전한 몸으로 가장 정교한 무기를 만들었다. 신들 세계에서조차 온전함은 필수가 아니었다. 기술과 집중, 반복과 집요함이 신성을 대신했다.
그 여성을 보며 필자는 '결핍'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쉽게 오해되는지 생각했다. 인지심리학은 인간을 "결손을 보완하는 존재"로 본다. 뇌는 가소성을 지닌 기관이다. 특정 기능이 제한되면 다른 회로가 재조직된다. 신경과학은 이를 재배선(Rewiring)이라 부른다. 재배선(Rewiring)은 뇌가 경험, 학습, 또는 부상에 대응해 스스로 구조와 기능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결핍은 끝이 아니라 희망을 재구성하는 시작이다.
우리는 그것을 '의지'라 말하지만, 실은 환경과 반복에 적응된 결과이다.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는 무엇을 '정상'이라 부르는가. 팔이 두 개인 몸을 표준으로 삼는 사회는 그 표준에 미달하는 몸을 불완전이라 명명한다.
 
그러나 표준은 자연이 아니라 문화가 만든다. 고대 민담 속 영웅들은 대개 상처를 지닌 존재였다. 한쪽 눈을 잃은 장수, 한쪽 다리를 저는 사내, 말 못하는 소녀. 그들은 부족함 속에서 다른 감각을 키워냈다. 공동체는 그들을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다른 능력을 지닌 존재로 받아들였다.
 
영상 속 그녀 웃음은 긍정성 심리학이 말하는 낙관과는 조금 달랐다. 그것은 상황을 부정하는 낙관이 아니라, 조건을 통과한 뒤 남은 태도였다. 마틴 셀리그먼이 말한 '학습된 낙관'은 현실을 왜곡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을 해석하는 방식을 바꾼다. 그녀 표정은 "나는 불행하지 않다"는 선언이 아니라 "나는 여전히 할 수 있다"는 반복에 의한 결과였다.
 
우리는 건강한 몸으로도 쉽게 불평한다. 이 사실은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인지적 습관에 대한 문제다. 인간 뇌는 부정적 자극에 더 민감하다. 생존을 위해 진화한 경계 체계 때문이다. 불평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반복되면 정체성이 된다. 반대로, 반복된 시도는 능력이 된다. 그녀 발가락은 손이 됐고, 손은 다시 도구가 됐으며, 도구는 곧 자유가 됐다.
 
필자는 그때 혈액암과 투병했던 안젤라를 떠올렸다. "건강한 사람이 가장 부럽다"고 말하던 목소리. 건강은 당연한 전제가 아니라 조건이다. 조건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책임을 동반한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은 과격해 보이지만, 실은 몰입과 집중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그리스 서사시 속 영웅들은 광기와 집중과 몰입이라는 경계에서 싸웠다. 아킬레우스 분노, 오디세우스 집요함. 극단적 몰입이 운명을 밀어냈다.
 
치열성은 단순한 노력의 양이 아니다. 반복을 견디는 감각이다. 동일한 동작을 수천 번 반복하며 신경회로를 새기는 시간, 실패 뒤 다시 시도하는 고요한 태도. 그것은 외부로 드러나는 격렬함이 아니라 내부에서 지속되는 압력이다. 시학으로 말하자면, 삶은 한 편의 장시(長詩)다. 운율은 반복에서 생기고, 의미는 변주에서 태어난다.
 
영상 속 젊은 여성은 신화 속 인물이 아니다. 전설도 아니다. 그러나 그 일상은 이미 서사 한 편이다. 그는 영웅과 같은 제스처 없이 영웅과 같은 시간을 산다. 팔이 없다는 사실보다 발가락으로 세상을 다시 구성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필자는 묻는다. 얼마나 치열한가. 두 팔을 가진 필자는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가. 불평은 쉬웠고, 반복은 어려웠다. 오늘 아침 이후, 필자 기준은 조금 바뀌었다. 기적은 외부에서 오는 사건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선택이라는 사실을.
헤파이스토스가 대장간에서 망치를 들었듯, 우리는 각자 자리에서 무엇을 두드리고 있는가. 치열성은 소란이 아니다. 조용한 지속이다. 그리고 그 지속이 어느 날 기적처럼 보일 뿐이다. 눈가를 적신 것은 연민이 아니라 각성이었다. 더 치열해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