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산 4번지에 가면 고려시대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된 여산송씨의 시조 송유익(宋惟翊)의 묘가 있다.    그는 고려 때 진사로 나라에 공훈을 세워 여산군에 봉해졌고, 여산은 현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이기에 이곳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송유익의 선계는 중국의 경조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호부상서를 지낸 송주은의 후손 송자영이다.    송자영은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송유익은 여산송씨 시조가 되고, 차남 송천익은 은진송씨, 막내 송문익은 서산송씨의 시조가 되어 우리나라 모든 송씨들의 연원을 이룬 것으로 전해진다. 이 중 여산송씨들은 그의 4세손 송송례(宋松禮)가 고려 원종 때의 공신으로서 가문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전한다.    그는 고려 원종 때 왕실을 위협하던 권신 임연(林衍) 일파를 제거한 공으로 추성익대보리 동덕좌명공신(推誠翼戴輔理同德佐命功臣)에 책록되었다. 이어 벽상삼한삼중대광, 광정대부문하시중, 판전리사사, 상장군에 올랐으며, 더불어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지고 식읍 1천 호를 받았다. 이로써 여산송씨 가문의 기틀이 잡혔으며 이때부터 후손들은 송송례를 중시조로 삼고 있다.    이후 여산송씨는 조선시대 영의정 1명과 좌의정 1명, 왕비 1명을 배출하였으며 판서급 인물들은 여럿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 후예들은 현재 전국적으로 퍼져있으며 2015년 현재 우리나라 여산송씨의 총인구는 298,231명이며, 본관 여산(礪山)은 여산면의 지명으로 여량(礪良)과 낭산(朗山)이 합쳐진 이름이라고 한다.    문중의 후예들은 여산면 호산리에 있는 시조 묘의 음덕으로 여산송씨들의 번창을 의심치 않아 과거 6.25 사변 후 제2 논산훈련소에 문중의 땅이 편입될 뻔했던 것을 막아냈고, 호남고속도로에 편입될 위기에서도 적극적으로 막아냈다. 이곳의 산세는 금남정맥 완주군의 왕사봉(718.9m)에서 북서쪽으로 뻗어 올라간 지맥이 화산면의 까치봉(456.1m)을 지나 논산시 연무읍의 함박봉(403.1m)에 이른다. 여기서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와 작은재(350m)를 지나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완주군 비봉면에서 천호산(501.3m)을 일으켜 이 묘소의 주산이 되었다.    송유익의 묘소는 이곳 천호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온 지맥이 과협(過峽)을 하고 다시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온 산줄기에 아들 송숙문과 함께 상하로 모셔져 있다. 풍수에서는 계수즉지(界水則止)의 원칙하에 혈은 용진처(龍盡處)에서만 맺는다고 하였으나 시조의 묘는 용맥의 중간에 모셔져 있다.    일부에서는 이곳의 혈장을 괴혈(怪穴) 중의 하나인 기룡혈(騎龍穴)의 명당 터라고 소개하고, 호남의 8대 명당 중 한 곳이라며 극찬하고 있다. 그런데 기룡혈이 되려면 혈장에 분명한 혈증(穴證)이 있거나 청룡·백호가 용맥의 끝까지 뻗어 나가지 않고 혈까지만 내려와 감싸주던지, 분명 혈의 기운을 보호해주는 증거가 있어야 기룡혈로 인정받을 수가 있다.    본인의 식견으로는 이곳보다는 좀 더 아래쪽의 용진처가 기운이 더 뭉친 정혈처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져본다. 이 묘소의 좌향은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남서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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