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13일 하오 6시, 오륙도를 지나 부산진 앞바다에는 왜선들이 까맣게 몰려왔다. 선봉장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이고 배는 700척, 군사는 1만8700명인데, 조정에 올라오는 장계마다 왜선의 숫자와 배에 탄 군사의 수는 달랐다. 배의 수는 불어나고 있었고 심지어는 무역을 위한 배라고도 했다. 4월 14일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공격했다. 첨사 정발(鄭撥)은 성민들이 놀라 당황하자 퉁소를 불게 하여 진정시켰다. 그는 흑색 갑옷을 입고 큰 활을 쏘며 지휘했으나 적탄에 전사한다(부산역 앞 초량에는 그의 동상이, 좌천에는 제단 ‘정공단’이 있다).다음날인 15일에는 동래성 전투가 있었다. 성을 포위한 일본군은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면 길을 내놓아라’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부사 송상현(宋象賢)은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 글을 쓴 판자를 성밖에 던져 항전하고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부전역 앞 송상현 광장에 동상이, 동래읍성에 제단 ‘송공단’ 이 있다).18일에는 2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2만2800명), 19일은 3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1만1000명)이 상륙했다. 1군(고니시)은 밀양-대구-상주-문경의 중로, 2군은 울산-경주-영천-충주-양평의 동로, 3군은 김해-창녕-성주-김천의 서로로 한양을 향해 진격했다. 21일 가토 군이 기세등등하게 경주로 밀려들어 저항도 없이 무너졌다. 유서 깊은 고도 경주를 무혈 입성한 것이다.조정에서는 명장 신립(申砬)으로 도성의 방어선인 충주를 지키게 했다. 28일 벌어진 탄금대 전투에서 8000의 군사로 배수진을 치고 네 번 승리했으나 전세가 기울어져 그는 결국 남한강에 투신하고 만다. 30일 새벽 선조는 돈의문(서대문)으로 도성을 빠져 나가고 도성은 약탈, 방화 난동이 일어난다.5월 3일 고니시는 흥인지문(동대문)으로, 가토는 숭례문(남대문)으로 한양 입성한다. 이는15~20일 걸린 것으로 당시 백성이 한양까지 걸어가는 날과 차이가 없었다. 각지에서 거의 전투 없이 진군한 것이다. 열린 성문으로 입성한 고니시는 선조가 이렇게 튼튼한 성곽을 버리고 무엇이 무서워 도망갔는지 비웃었다고 한다. 육전에서는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 위주의 일본군에 고전했으나 해전에서는 함선의 파괴력이 강한 화포로 조선군이 우세했다. 일본 수군은 함상 백병전을 주전법으로 사용했으나 조선 수군은 함대간 포격전을 전개하였다. 7월 금산전투, 한산대첩을 분기점으로 이 후 의병의 봉기, 명군의 참전, 평양성 탈환으로 전세는 역전된다. 일본의 주력 무기인 조총은 사거리가 200m인 반면 조선 수군의 화포는 사거리가 1km 이다. 일본 수군의 함선이 포구에 배를 정박해 놓으면 이순신의 함대가 격파하므로 도요토미는 왜성을 쌓도록 명했다. 울산에서 기장, 부산, 거제, 사천, 순천까지 남아 있는 왜성이 열 두 곳인 이유다.지난 겨울 울산, 기장, 사천, 순천 왜성을 찾아다녔다. 공원이 된 곳(울산), 바다 전망이 절경인(서생포), 허물어진 곳과 사유지(기장), 유원지가 된 곳(사천) 등 다양하나 공통점으로는 경사진 성벽과 물길이 배로 이어지는 바다에 가까운 곳이었다. 그 중 순천왜성의 규모는 실로 거대하다. 적을 포위공격 할 수 있는 굽이굽이 모퉁이 관문, 경사진 성벽, 바다를 조망하는 천수각, 뒤로는 대군이 이동할 수 있는 넓은 진군로. 실제 성은 난공불락이었다. 귓가에 조총을 들고 줄지어 나가는 일본군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하다.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당분간 비밀로 취급되었다. 정권의 중추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은 일본군 철수 명령을 내렸다. 전쟁은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히데요시의 죽음을 전달하는 사절이 부산에 도착한 것은 그해 10월 1일이었다. 10월 2일 조명 연힙군은 육지와 바다에서 순천성(고니시)을 총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한다. 11월 19일 포위된 일본군의 퇴각을 위한 노량(남해) 해전에서 이순신(李舜臣, 1545~98)은 총탄에 맞아 전사한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였다. 일본군은 전쟁을 시작한 오륙도로 빠져나가면서 7년 전쟁은 끝이 났다.일본은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하는 파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파로 나뉜다. 왜란의 선봉장들이 갈라진 대립은 새키가하라 전투(關ケ原合戰, 1600)의 도화선이 되어 도쿠가와 막부로 정권이 교체된다. 명은 조선에 파병한 여파로 국경을 마주한 여진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요동에는 누르하치의 후금이 건국한다(1616).조선은 명의 파병 요구에 원병을 보냈으나 전투는 참패한다(사르후 전투, 1619, 도원수 강홍립). 실리냐 명분이냐의 갈림길은 지금도 어려운 선택인데 광해군을 폐위하고 명을 고집한 신료들은 인조를 옹립한 인조반정(1623)으로 호란을 맞게 된다. 전쟁을 도와준 동맹국 미국과 날로 강성해지는 중국의 사이에 낀 오늘의 우리와 흡사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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