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生)은 결국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먹느냐로 정의되는지도 모른다. 아내와 사별한 후, 가장 먼저 정적(靜寂)이 찾아든 곳은 거실이 아니라 냉장고 속이었다. 한때는 온갖 식재료로 빼곡하여 생활의 활기가 넘쳐나던 은밀한 공간이, 주인이 떠난 뒤로는 차가운 냉기만 감도는 황량한 창고로 변해갔다.   혼자 사는 사내에게 밥이란 생존을 위한 최소한 배부름에 불과했다. 끼니를 때운다는 표현만큼 서글픈 말도 없었다. 허기를 지우기 위해 대충 물에 말아 삼키는 밥알은 목구멍을 넘어갈 때마다 모래알처럼 서걱거렸다. 김지하 시인은 일찍이 “밥은 하늘”이라 노래했지만, 홀로 된 필자 식탁에서 밥은 그저 견뎌야 할 고독한 증거일 뿐이었다. 하지만 텅 빈 냉장고에 다시 온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필자가 부지런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필자 주변을 에워싼 이들이 보내준 ‘생명 전령’들 덕분이었다. 최근 필자 사무실 냉장고는 다시금 풍성한 색깔로 바뀌었다. 시 낭송가 홍성례 선생님이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보리 잡곡밥과 정갈한 다섯 가지 반찬이 그 시작이었다. 뒤이어 김영희 선생님 또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잡곡밥과 향긋한 카레, 나물무침을 내어놓았다. 그리고 필자 벗이자 연인인 강해은(姜海隱) 정성까지 더해졌다. 그들이 가져온 것은 단순한 음식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김지하 시인이 말한 ‘이천식천(以天食天)’ 현현(顯現)이었다. 시인은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고 했다. 필자가 먹는 밥 한 그릇 속에 깃든 햇살과 바람, 대지의 기운, 그리고 그것을 정성껏 지어낸 이의 노동과 마음이 모두 ‘하늘’인 것이다. 거룩한 우주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필자 자신 또한 귀하게 대접받아야 할 ‘하늘’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들이 싸 온 반찬통을 열 때마다 필자는 순환하는 우주 이치를 깨닫고 있다. 보리알 하나하나 농부 땀방울과, 반찬을 무치며 필자를 걱정했을 사람들 눈빛이 밥상 위에 별처럼 쏟아졌다. 밥을 먹는 행위는 이제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생물학적 욕구를 넘어, 타인 생명력을 필자 몸속에 모시는 가장 경건한 의식이 되었다. 김지하 밥 사상에서 핵심 가치는 ‘나눔’에 있다. “밥은 여럿이 갈라 먹는 것”이라는 그의 말은 평등과 상생의 경제학을 담고 있다. 하늘을 어느 한 사람이 독점할 수 없듯, 생명 근원인 밥 역시 누군가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사별 후 홀로 된 필자에게 찾아온 이 음식들은 ‘반(反)독점’에 대한 실천이기도 하다. 세상은 각자도생을 외치며 자기 몫의 밥그릇을 챙기느라 혈안이 되어 있지만, 필자 인연들은 자신의 밥상을 기꺼이 쪼개어 필자의 텅 빈 냉장고를 채워주었다. 이는 소외된 영혼을 공동체 온기 안으로 다시 끌어들이는 민주주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이다. 사무실 의자에 앉아 가져온 카레를 데우고 나물을 식탁에 올리며, 필자는 ‘홀로 있음’의 고독에서 ‘함께 있음’의 연대로 치유되어 가고 있다. 밥을 나누는 행위는 곧 평화를 나누는 것이며, 서로 생명을 지탱해 주겠다는 무언의 약속이다. 필자 냉장고 속에 겹겹이 쌓인 찬합들은 필자를 지키는 든든한 성벽이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도서관이다. 그곳에는 ‘사랑’이라는 문법으로 쓰인 생명에 대한 서사시가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필자는 밥상을 마주할 때마다 숙연해진다. 수저를 들기 전, 잠시 이 음식이 내게 오기까지 여정을 떠올려 본다. 홍성례 선생님의 섬세한 손길, 김영희 선생님의 넉넉한 마음, 그리고 늘 곁에서 온기를 보태주는 필자 옆지기 된 姜海隱 사랑.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식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며 철학이다. 사별의 아픔이 남긴 자리는 여전히 깊지만, 그 빈자리를 ‘사랑의 밥’이 채워주고 있다. 이제 필자는 외롭지 않다. 필자 몸속으로 들어오는 이 거룩한 하늘들이 필자를 살게 하고, 다시금 펜을 들어 글을 쓰게 하는 동력이 된다. 오늘도 필자는 냉장고 문을 연다. 그곳에 저장된 것은 보리밥과 반찬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보듬는 ‘상생의 미학’이다. 밥은 하늘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늘이 되어주는 이 거룩한 공양(供養) 속에서, 필자 삶은 다시금 푸르게 싹을 틔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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