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보통은 심한 스트레스 탓이라고 돌리지만 사실 여기에는 뇌 속의 복잡한 호르몬 장난이 숨어 있습니다. 특히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은 그동안 뇌세포를 보호하고 기억력을 높여주는 수호천사 같은 존재로 알려져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이 천사가 때로는 우리 기억을 망가뜨리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그동안 의학계에서는 에스트로겐 수치가 높을수록 스트레스에 더 잘 견디고 뇌 기능이 활발해진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연구는 이 상식을 뒤집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여러 가지 스트레스가 동시에 몰려올 때 오히려 뇌 속 에스트로겐 수치가 높으면 기억력이 더 심하게 손상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성의 경우 생리 주기 중 에스트로겐이 가장 높은 시기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상처가 더 깊고 오래 남는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비밀은 뇌의 기억 저장소인 해마 속 유전자의 문에 있었습니다. 에스트로겐은 뇌가 새로운 것을 배우기 쉽도록 유전자의 문을 활짝 열어두는 역할을 합니다. 평소에는 학습을 돕는 유연함이 되지만 강한 스트레스가 닥치면 이 열린 문을 통해 나쁜 기억의 흔적이 뇌에 더 쉽게 각인되는 것입니다.    이때 남성은 ER alpha라는 수용체가, 여성은 ER beta라는 수용체가 이 과정을 주도한다는 사실도 새롭게 확인되었습니다. 여성이 트라우마에 더 자주 노출되는 생물학적 이유를 설명해 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뇌가 너무 말랑말랑하고 유연한 상태일 때 겪는 고통이 더 치명적인 셈입니다. 에스트로겐은 뇌를 똑똑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마음의 흉터를 더 진하게 남기는 양날의 검이었던 셈입니다.    이번 연구를 통해 왜 여성이 남성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두 배나 더 취약한지 그 근본적인 이유에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법도 이제는 뇌의 유연성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오늘 들으실 곡은 슈만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C장조 op. 131번입니다. 환상곡이라는 말 그대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펼쳐지는 음악입니다. 그래서 이 곡을 듣다 보면 정해진 길을 따라간다기보다는, 어느 인생의 여정을 함께 걷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슈만은 낭만주의 초기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들은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조차 작곡가가 세상을 떠난 뒤 수십 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 환상곡 역시 초연과 출판은 이루어졌지만, 지금까지도 연주회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이 곡은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의 요청으로 1853년에 쓰였습니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악보를 함께 보내며 환상곡 하나를 써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슈만은 며칠 만에 곡의 틀을 완성했고, 요아힘은 슈만의 집에서 이 곡을 직접 연주했습니다.    이후 뒤셀도르프에서 슈만의 지휘로 초연되었고, 다음 해 다시 연주되었는데, 그날 무대에서 클라라 슈만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습니다. 그 공연이 슈만이 두 사람의 연주를 마지막으로 들은 순간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음악은 C장조로 되어 있지만, 시작은 뜻밖에도 A단조의 어두운 분위기로 문을 엽니다. 조용하고 쓸쓸한 서주가 지나가면, 조금은 머뭇거리는 듯한 밝은 주제가 나타납니다. 이 주제는 곡 전체를 관통하며 여러 모습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기쁨과 망설임, 활기와 그늘이 교차하면서, 하나의 삶이 천천히 펼쳐지는 느낌을 줍니다.    고전적인 소나타 형식을 따르면서도, 틀 안에서 자유롭게 감정을 풀어내는 점이 슈만다운 부분입니다. 이 작품은 한때 슈만의 말년 작품이라는 이유로 그의 정신적 불안정함과 함께 평가절하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혼란보다는 솔직함이 먼저 다가옵니다. 꾸미지 않은 감정, 삶을 바라보는 따뜻하면서도 쓸쓸한 시선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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