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산35번지에 가면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조선 세종 때에 영의정으로 추증된 강릉최씨의 중시조 최입지(崔立之)의 묘역이 있다. 그는 최흔봉(崔欣奉)의 12대손으로 강릉최씨 평장공파(平章公派)의 시조이다.    원래 최입지는 최흔봉을 시조로 하는 본관이 완산(完山)이었으나 시조의 묘가 실전되었고, 시조로부터 12세손인 충숙공 최입지가 강릉군에 봉해지면서 그 후손들은 강릉을 관향으로 쓰게 되어 그를 중시조로 모시게 되었다. 최입지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유학 경전에 밝았으며, 1275년(충렬왕 1)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간 것으로 전해진다.    벼슬은 광정대부문하평리상호군(匡靖大夫門下平理上護軍)을 거쳐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를 역임했으며 강릉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는 중앙 관직과 지방 수령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이름을 얻었고, 특히 향리 사회의 교화와 인재 양성에 힘써 지역 사회의 존경을 받았다.    당시 고려 말은 권문세족의 세력 다툼과 왜구의 침입 등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웠으나, 그는 공직자로서 직분을 다하며 백성의 안정을 도모하는 데 힘썼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학문과 덕행을 중시하는 가풍을 남겼다고 전해지는데, 이러한 전통은 이후 강릉최씨 가문에서 많은 문신과 학자를 배출하는 기반이 되었다.    말년에 강릉 모산(母山)에 은거하여 후손이 여러 대에 걸쳐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기 때문에 최입지가 살던 곳인 현재의 강릉시 장현동 모산의 지명을 평장동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개국 후 수태사태상(守太師太常)으로 증직 되었고, 세종 때는 영의정에 가증(加贈)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淑)이다. 이곳의 산세는 백두대간 곤신봉(1,137m)에서 북동쪽으로 뻗어나간 지맥이 대궁산(1,008.3m)과 이어 대관령 휴게소를 지나 다시 동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온다. 이 용맥은 성산면 금산리 소목 고개를 지나 묘소 뒤 조그마한 봉우리(110m)를 일으켜 본 묘역의 현무봉이 되었다.    최입지의 묘소는 묘역 뒤 현무봉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나간 줄기에 7기의 묘가 있고 최입지는 제일 끝 지점에 부인 경주최씨와 쌍분으로 모셔져 있다. 이 중에서 위쪽의 묘소들은 모두가 맥이 그냥 지나가는 과룡처이고 최입지의 묘가 용진처(龍盡處)로 기운이 제일 응집된 장소로 보인다.    또한 이곳은 풍수 형국상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의 명당으로 소문나 있다. 백호 자락이 묘소 앞까지 길게 뻗어 나와 감싸주는데 그 모양을 거문고로 본 것이다. 여기에 뒤쪽의 현무봉이 둥근 금형산이라 이것을 옥녀로 보고 옥녀가 좌정하여 거문고를 타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금산리라는 지명도 이곳 거문고에서 따와 금산(琴山)이라 했다가 나중에 강릉김씨들이 많이 산다하여 금산(金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풍수에서의 형국론은 산천의 생긴 모양을 보고 사람이나 사물 또는 동물이나 식물, 문자 등 어떤 형상에 비유하여 혈을 찾거나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것은 우주 만물은 저마다 모양이 있고 그 모양에 따라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기(氣)가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에 산천의 겉모양과 그 안의 정기는 서로 상통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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