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가 품고 있는 이름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익숙하지만 또한 낯선 이름 하나를 꼽으라면 ‘처용’일지 모른다. 얼핏 처용가면과 처용무를 떠올리겠지만 정작 우리는 처용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붉은 얼굴에 큰 눈, 기이한 웃음을 머금은 한 장의 익숙한 이미지 뒤편에는 기록에서 지워진 처용의 수많은 얼굴과 춤, 그리고 경주라는 도시의 깊은 기억이 숨어 있었다.   김용목 신라처용무보존회장은 최근 수년간의 집요한 탐구 끝에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처용무 가면과 복식의 제작 방법에 관한 현대적 전승 연구’를 통해 “처용은 단 한 번도 하나의 얼굴로 머문 적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경주의 살아있는 '현대판 처용', 처용의 현재형인 듯한 그를 지난 24일 경주시 남산동 연구실에서 만났다.    이 논문에서 김용목 연구자는 오랜 현장 경험을 통한 문제의식을 녹여, 처용무 가면·복식의 원형과 왜곡 과정을 학술적으로 규명하고 ‘악학궤범’을 기준으로 한 전범(典範) 복원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또 실제 제작 기준(색상·재료·착용법)까지 제시한 실천형 논문으로서, 향후 처용무의 정체성 회복과 지속 가능한 전승 방향까지 제안했다.   김 연구자는 처용무 이수자로서 김천흥·김용 계보의 처용가면 제작에 직접 참여하며 실무 경험을 쌓았다. 1996년부터 처용가면의 크기·색상·눈 위치·착용감 등을 7차례 수정하며 전통 기준에 맞는 가면 제작을 진행했고 일부 작품은 김천흥과 김용이 소장했다. 또 처용복과 가면 제작·보급에도 관여하며 현재 전승되는 처용 가면과 복식이 제작자 해석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로 유통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는 처용무의 춤, 가면, 복식, 용례에 관한 전범(典範)이 집약돼있는 ‘악학궤범’에 제시된 사항을 원형의 기준으로 삼고 이후의 변화를 전승사적 측면에서 고찰했다.   ‘처용은 단 한 번도 하나의 얼굴로 머문 적이 없다’는 그의 결론은 삼국유사에서 고려사, 조선의 악학궤범, 의궤와 계첩, 각종 회화 자료에 이르기까지 흩어진 사료를 모아 처용의 형상과 의미를 추적한 결과다. 그가 정리한 논문과 단행본 출간 작업(예정)은 단순한 민속 연구를 넘어 경주 문화정체성을 다시 묻는 작업으로 읽힌다.   이번 연구의 출발점은 의외로 한 장의 그림이었다. 2016년 청주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18세기 ‘기로계첩’ 속 처용무 그림을 접한 김 연구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악학궤범의 처용탈과 전혀 다른 모습의 처용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턱이 길고 이목구비가 다르며 복식과 분위기 또한 지금의 통념과 거리가 멀었다. 그 순간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처용은 과연 진짜 전부일까’라는 물음을 던지게 되고, 이후 10년 가까운 조사로 이어졌다. 전국 각지에 흩어진 문헌과 그림, 고문서를 뒤지고 한문 기록을 대조하고 국악·무용·복식 연구 성과를 함께 검토했다.   해석자의 시각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한문 자료의 한계를 넘어 음악과 춤, 제례문화까지 함께 읽어내야 했기에 작업은 더욱 더디고 고됐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결국 하나의 성과로 모여졌다.   김 연구자가 가장 강조하는 대목은 처용의 다층적 기원이다. 우리는 흔히 ‘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조’만 기억한다. 동해 용왕의 아들 처용이 헌강왕을 도와 경주로 와 미녀를 아내로 맞고 역신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는 그 뒷부분의 기록들이야말로 더 중요하다고 본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 왕에게만 보였다는 이야기, 헌강왕때 동례전 잔치에서 지신(地神)을 자처한 존재가 등장했다는 기록, 금강령에서 기이한 복장의 네 사람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는 기록 등은 처용 서사가 단순한 한 인물 전설이 아니라 신라 왕경의 산신·지신·용신 신앙, 궁중 연희, 국가 제의가 복합적으로 융합된 결과라는 것이다.   곧 처용은 한 사람의 이름이기 이전에 신라 왕경 경주가 만들어낸 상징 체계였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경주와 처용의 관계는 더욱 분명해진다.    포석정, 남산, 망해사, 왕경의 궁중 공간 등 처용 설화의 무대 대부분이 경주와 그 권역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울산 처용암 또한 오늘날의 행정 경계가 아닌 신라 서라벌 권역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오늘날 지자체 경계로 ‘누구의 문화유산인가’를 다투기보다는 신라 문화권 전체의 유산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 연구자는 조선시대 자료 분석에서도 중요한 성과를 제시한다. 세종대에 이르면 오방처용무가 제도화되고 다섯 명이 오방색 의상을 입고 추는 형식이 정착된다. 또 세종이 “여기(女妓) 대신 남악(男樂)을 쓰라”고 지시한 기록은 그 이전까지는 여성 연희자들도 처용무를 추었다는 사실을 역으로 보여준다고 했다. 남성만의 춤으로 알고 있던 기존 통념을 뒤집는 대목이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악학궤범’은 처용의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고정한 문헌이다. 여기 실린 처용탈 그림과 제작법, 복식 규정은 이후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처용의 표준형이 됐다. 그러나 김 연구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경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악학궤범’의 처용은 수많은 처용 가운데 하나일 뿐, 유일한 원형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 그가 수집한 조선 후기 회화 자료 속 처용들은 얼굴형, 코와 턱의 길이, 눈매, 색감, 수염의 표현까지 모두 다르다. 시대와 지역, 화원의 미감에 따라 처용은 계속 변주된 셈이다. “처용은 하나의 얼굴이 아니라 여러 얼굴의 총합”이라는 그의 결론은 그래서 나온다. 복식 연구에서도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악학궤범에는 의상의 길이와 치수가 상세히 적혀 있지만 오늘날 단순 환산해 복원하면 실제 춤을 추기 어려울 만큼 길거나 불편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영조척·주척·포백척·예기척 등 용도별 자(尺)가 달랐기 때문에, 어떤 기준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 처용무 복원의 정밀한 기준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논문은 학계에 머무르지 않는다. 김 연구자는 보다 읽기 쉬운 대중서 형태로 내용을 보강해 ‘또 다른 처용’ 출간을 앞두고 있다. 사진 자료를 대폭 늘리고 논문에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덧붙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출판기념회를 앞두고 처용탈 전시, 처용무 공연, 학술 대담을 함께 묶어 시민들이 직접 보고 느끼는 문화행사로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간의 연구가 서가에 꽂힌 논문으로 끝나지 않고 지역사회 안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기를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경주는 수많은 유산을 가지고 있지만 때로는 너무 익숙해서 보지 못한 유산도 많다. 처용이 그렇다. 관광상품으로 소비되거나 한 장의 이미지로 굳어버린 처용을 다시 살아 있는 역사로 돌려놓는 일, 바로 그 일의 시작점에 이번 연구가 지니는 가치는 높다. 처용은 하나의 얼굴이 아니었다. 오래된 또 다른 여러 얼굴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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