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5월 14일자 ‘매일신보’ 에는 ‘금일은 순성하세’ 라는 제목으로 한양도성 순성 놀이를 지면의 절반을 할애해 비중있게 실었다. 이른바 순성장거(巡城壯擧, 한양도성 순성을 위한 장대한 계획)를 알리는 기사의 말미에는 출발 시간과 장소에 대한 공지도 함께 게재했다. '고대하시던 순성장거는 오늘 14일 오전 7시 30분 남대문 소학교에 모였다가 8시 남대문에서 출발하는데 회비도 필요없고 점심만 휴대하면 어느 누구라도 마음껏 참가할 수 있습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어 도읍을 송악(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긴 태조 이성계는 ‘종묘와 경복궁, 도성都城’의 축조를 독려했다. 백악을 주산으로 좌청룡 낙산과 우백호 인왕산으로 삼아 경복궁이 창건(1395)되고, 왼쪽에 종묘와 오른쪽에 사직단을 두었다.   1396년(태조5) 한양의 동서남북 네 산줄기를 잇는 도성이 완성되었다. 총 길이는 1만8627km로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목멱산, 북쪽의 백악산의 내사산內四山으로 둘러 쌓인 천연의 요새가 만들어진 것이다. 도성 동서남북 중심에는 사대문을 세웠다.   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북쪽의 숙정문(肅靖門)으로, 조선의 국시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이념을 문 이름에 구현했다. 지(智)는 창춘대성의 홍지문(弘智門), 신(信)은 보신각(普信閣)에서 찾을 수 있다. 사대문 사이에는 혜화문(惠化門), 소의문(昭義門), 광희문(光熙門), 창의문(彰義門)을 두어 도성의 안과 밖을 교통하게 했다.   성문은 도성 중심 보신각 종루에서 밤 10시경 상문을 닫는 인정(人定) 종소리를 28번 울리고, 새벽 4시경 성문을 여는 파루(罷漏)종소리를 33번 울렸다. 오늘날 제야의 종을 33번 치는 것은 한 해를 새롭게 맞이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양도성은 일제 히로히토 황태자의 1907년 10월 서울 방문을 계기로 파괴되었다. 일제는 사대문 중 산중에 있는 숙정문을 빼고,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을 다 헐고자 했다. 조선거류민단장 나카이 기타로가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한양을 입성한 흥인지문과 숭례문은 전승 기념물이므로 후세에 남겨야 한다’ 고 해서 두 문은 살아 남는다. 돈의문으로 전차가 다닐 때만(1899) 해도 성곽은 온전하게 남아 있었으나, 일제가 전차궤도를 복선화 한다는 명목으로 돈의문은 해체된다.(1915. 6. 11)   지난 4월 26일 KBS ‘역사스페셜-단종과 수양’ 편에는 사라진 돈의문(서대문)이 AI로 복원되었다. 지금 경교장(강북삼성병원 내) 앞 새문안로-정동길 복판인데, 실로 웅장했다. 이 날 ‘계유정난’ 편에서 김종서 집은 돈의문 밖인데 그날 밤 수양의 급습에 당한 그는 성문이 닫혀 도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수양이 도성을 봉쇄한 것이다. 그가 도성으로 들어갔다면 역사는 바뀌었으리라!   2008년 2월 10일 저녁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했다. 자정을 넘어 거대한 불기둥은 숭례문을 뒤덮었고 다섯 시간 만에 숭례문은 무너져 내렸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도 견뎌왔던 숭례문은 그렇게 한 순간에 불타버렸다. 지켜보던 전 국민은 억장이 무너졌다. 숭례문은 5년 3개월 뒤 2013년 5월 4일 복원됐다.   한편, 경주읍성은 고려 현종 3년(1012) 경주부성(慶州府城)을 쌓았다.(고려사) 경주읍성도(김태중, 1931~2015)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약 2400m (동서 602×남북 630m)의 사각형으로 사방에 성문을 두어 징례문(徵禮門, 남문, 예를 밝히다, 현 포항물회 앞), 향일문(向日門, 동문, 해를 향하다), 망미문(望美門, 서문, 아름다움을 바라보다), 공신문(拱辰門, 북문, 뭇별이 북극성으로 향하듯 천자의 덕에 귀의함)이라 하였다. 남북으로 봉황로(鳳凰路), 동서로 북성로(北城路)를 두었다. 정문인 징례문 앞으로 종각이 있다.   징례문은 성의 정문인 2층 누각으로 신분에 상관없이 올라가 볼 수 있게 했으며, 상량문 두 편(전극항 1632, 이엄 1680)과 ‘古都南樓(고도남루)’ 현판이 걸린 사진(1909)이 남아 있다. 사진에는 흰 옷에 갓을 쓴 어른과 머리 땋은 소년 등 온 백성이 평화롭게 성을 드나드는 모습이다.(‘경주부의 역사’, 조철제)   1912년 11월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1910~16 재임)가 경주 방문 때 징례문은 철거된다. 이후 남북을 잇는 도로가 생기고 1915년 성벽을 관통하며 읍성은 원형을 잃었다. 1918년 10월에 세워져 서라벌회관 자리에 있던 경주 구역(舊驛)이, 1936년 성동동 구 경주역( ~2021. 12. 31)으로 옮겨졌다. 읍성 석재는 철도 노선에 사용된다. 성벽은 민가의 돌담으로, 축대로 사용되고 허물어진 읍성 돌은 섬돌, 주춧돌로 사용되었다. 우리가 잊고 지낸 새, 그렇게 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도 지명에는 성동동, 성건동, 성내동, 동부동, 서부동, 성동시장, 동문로, 북문로, 북성로, 봉황로, 성안길 등 읍성의 자취가 남아있다. 2018년 11월 8일 중수한 향일문에 서영수 시인(1937~2020)이 지은 상량문에 축시가 있다. ‘경주 읍성 축대 위에 / 천년 사직이 졸고 있다 / 너도 깨우고 나도 깨어서 / 새 하늘을 맞아 보자 / 어엿차 어이엇차 향일문아 열려라’   읍성 북문 앞 우물가, 라일락 꽃 향기가 5월 하늘 바람에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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