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이물통간죄란 국가의 허락없이 외국의 여자와 정을 통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의 외국출장처럼 사신이나 통역관으로 외국으로 따라간 자들이 현지 여자와 정을 통한 것이 발각돼 처벌을 받는가 하면 화대로 공금을 횡령한 경우 등이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풍계 현정은 1817년 해남 대둔사 천불전에 안치할 불상 1000기를 경주 기림사에서 조성해 장진포에서 배에 싣고 해남으로 가려다 부산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한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3개월 넘게 머물다 7개월여만에 대마도를 거쳐 돌아와 당시의 표류과정과 일본에서의 생활 등을 소상히 기록했는데 바로 일본표해록이다. 이를통해 일본의 성풍속도를 비롯 당시 조일관계에서 표류민의 처리과정과 일본의 생활풍습 등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성풍속도와 관련 왜녀들은 조선인을 좋아했으며 조선인과 정을 통해 아이를 낳으면 귀하게 여기므로 사사로이 정을 통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더구나 왜녀는 조선인과 정을 통한 후 관부에 사실의 전말을 스스로 보고하고 보고를 받은 관에서는 출산할 달 수를 계산하여 아이를 낳으면 돈을 준다고 했다. 또 표류인의 처리과정을 보면 당시에도 표류인에 대해 출신이나 일행의 소지품 등 신상파악은 물론 표류과정을 소상히 조사한 후 돌려보내면서 체류기간의 행적까지 조선에 통보한 것으로 나와 있다.
조선에서도 표류인이 돌아오면 당연히 조사를 받도록 되어 있다. 현정 일행 역시 표류했다 7개월여만에 대마도를 거쳐 부산에 돌아와 조사를 받았다. 이때 관리가 이번에 표류인 중에서 어떤 자가 여자와 정을 통했는데 그 여자가 자초지종을 관에 보고했다고 내용을 알려 왔다는 것이다. 관리는 만약 이 사실을 감영에 보고하면 즉시 이물통간죄로 처벌받을 것인데 한번 죽다 살아 돌아온 자를 어찌 다시 죽일 수 있겠느냐며 아래에서부터 미봉하여 없던 일로 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풍계는 왜녀가 스스로 관에 보고했다는 것이 거짓이 아닐 것으로 단정했다. 또 간통에 대한 일본의 풍속으로 남편이 있는 여자가 간통을 하여 세번 잡히면 간통한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세종실록 5년에 재상급인 지심사 조서로가 전 관찰사 이귀산의 부인 유씨와 간통을 했으나 유씨부인은 돌팔매와 함께 죽임을 당한다.
반면 조서로는 오늘날 포항인 영일로 유배형에 처해졌다는 기록으로 볼때 여자는 죽임을 당하고 남자는 가벼운 처벌에 그쳐 일본과 대조적이다. 또 조선은 간통죄 처벌의 어려움을 감안해 간통의 범위를 폭넓게 해석하고 있다.
세종실록 15년 6월 기록에는 같은 방에 있다 잡힌 것에 국한하지 않고 사통을 위해 한집에 있는 것도 간통으로 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선조때 역관 홍순언은 북경의 홍등가에서 만난 이름도 모르는 기생에게 공금까지 털어 속량시켜 주어 공금횡령죄로 처벌을 받기도 했다.
이후 기생은 예부시랑 석성의 첩실로 자리를 잡아 훗날 홍순언이 조선 200년의 난제였던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푸는데 도움을 준다.바로 이성계가 이인임의 후손이라는 기록을 이자춘의 아들로 바로 잡은 것이다.
조선은 태조3년 1394년부터 잘못된 기록을 바로 잡으려고 수차례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이 난제를 홍순원이 석성의 도움으로 1584년 종계가 수정된 대명회전을 받은데 이어 1589년 새로 편찬한 만력회전에도 기록을 수정함으로써 종계변무를 해결한 것이다.
오늘날 간통죄를 폐지한 사실에 비춰 당시 조선에서도 간통죄가 존재했었고 외국에서 이뤄진 외국여자와의 사통도 죄가 됨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