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에는 신라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경주의 모습을 한마디로 사사성장 탑탑안항(寺寺星張 塔塔雁行ㅡ 절들은 별처럼 벌어져 있고 탑들은 기러기 행렬처럼 늘어져 있다)으로 표현할 만큼 절집으로 가득찼다고 했다.  그렇다면 신라 최초의 사찰은 어떤 곳일까. 법흥왕은 527년 이차돈의 순교 이후 흥륜사를 건립하기 위해 터를 닦고 535년 천경림의 나무를 이용해 절을 짓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진흥왕이 공사를 계속해 544년에 신라 최초의 사찰이라는 흥륜사를 완공한 것으로 돠어 있다. 그러나 유사의 기록으로는 신라 최초의 사찰은 흥륜사가 아닌 자추사다.  527년 이차돈이 죽고 금강산에 장사 지내면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자추사라 한 것으로 보면 흥륜사보다 먼저 자추사가 세워졌고 여러해의 준비과정을 거쳐 흥륜사가 완공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추사는 오늘날 백률사로 불려지고 있다. 물론 자추사는 국찰이 아닌 이차돈의 명복을 비는 정도의 조그만한 절집 수준으로 볼 수 있다.  유사의 표현도 난야를 짓고 자추사라고 했다(造蘭若 名曰刺楸寺)고 돼 있어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또 진흥왕은 553년 황룡사 건립에 착수해 569년 담장을 완공함으로써 신라는 흥륜사와 황룡사를 중심으로 국정을 수행하게 된다.   반면 신라보다 먼저 불교를 도입한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 372년에 전진으로부터 순도가 불법을 전파하고 375년에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창건했다. 백제 역시 침류왕 원년 384년 동진으로부터 마라난타가 불법을 들여오면서 385년 새로 도읍한 한산주에 사찰을 건립하고 도첩 승려 열명을 두었다고 되어 있다.  또 가락국기에는 수로왕이 도읍지를 정하면서 18나한이 상주하기 좋은 곳이라며 이미 불교를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 8대 질지왕 2년 452년 수로왕과 황후가 결혼했던 자리에 왕후사라는 절을 세웠다고 했다.  그러나 가락국기는 고려 문종때인 1076년 쓰여진 기록으로 가락국의 불교유입시기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사찰의 등장은 의외라 할 것이다.  신라는 자추사와 흥륜사 건립 이후 도성인 경주를 비롯해 온 나라가 절집으로 가득차 한때 석탑과 사찰이 808개라는 기록도 있다. 또 고려 예종때의 문신인 정지상은 백률사라는 시에서 경주의 열집중 아홉집이 절집이었다고 읊었으며 서거정은 분황폐사라는 시에서 민가와 절집은 서로 이어져 있다라고 했다. 평민의 절반은 승려였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언급된 승려수만 해도 2백50여명에 달하고 사찰은 3백여개소다.   경주 남산에는 불상 80여기 탑 60여기 절터만해도 1백10여곳에 달할만큼 산 전체가 절이었다. 신라는 가히 불법의 나라라 할 만하다. 이같은 사사성장의 도시형태는 신라가 고려에 귀속된 이후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왕조가 사라진 황성옛터가 말해주듯 인구감소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사찰의 경제가 쪼그라 드는 것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삼국유사 삼소관음 중생사조에는 신라멸망 이후 시주받을 곳이 없어 금주(김해)지역까지 갔다는 것은 사찰이 처한 당시의 시대상을 대변하고 있다  고려까지 명맥을 이어가던 경주의 불교도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하나둘 사라지고 유학자에 의한 사원핍박으로 승려의 신분은 하층민과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됐다.  승려는 사원의 뒷바라지를 위해 노역을 제공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급기야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불교는 11개 종단이 7개로 축소되다가 세종때는 2개 종단으로 통폐합 된다. 사찰도 태종때 2백42개의 국가공인 사찰이 세종때는 36개로 줄어 들었음을 볼때 쇠락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중국 최초의 사찰은 백마사다. 67년 후한 명제때 인도에서 가섭마와 축법란이 불경과 불상을 백마에 싣고 낙양으로 오자 영빈관인 홍려시에 머물도록 한데서 68년 백마사를 건립한 것이 사찰의 시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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