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새벽 4시면 눈이 떠지고 일어나 처음 하는 일은 커피포트로 물을 끓이는 일이다. 물이 끓기 전까지 몇 분을 필자는 좋아한다. 커피포트는 말이 없고, 끓기 전까지 물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아침 루틴’이나 ‘휴식’ 같은 말이 붙기 전 상태이다. 그 앞에 앉아 기다릴 뿐이다. 끓기 시작하면 하루가 시작된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시작도 아니고 의미도 없다. 그저 온도가 변하고 분자가 흔들릴 뿐이다.
며칠 전 오래된 나무 의자를 버렸다. 다리가 약간 흔들렸고, 앉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사물에 의미를 부여한다. 함께한 시간과 기억, 누군가 체온. 그러나 막상 의자를 들어 올렸을 때 손에 닿은 것은 마모된 나무와 먼지뿐이었다. 의미는 들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의미가 사라지자 의자는 더 분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무게, 균형, 오래 눌려 생긴 자국. 필자는 그것을 그대로 두고 내려놓았다. 애도도 회상도 들지 않았다. 의자는 의자였을 뿐이다.
거리는 해석함으로 인식된다. 지하철을 이용해 출근하는 사람들 얼굴에는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피곤한 직장인, 지각한 학생, 무표정한 중년.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얼굴은 이야기보다 복잡하다. 긴장, 눈동자 흔들림, 호흡. 그것들은 의미를 읽기 전 겉모습이다. 필자는 얼굴들을 읽지 않으려고 애쓴다. 읽지 않겠다는 노력은 이상하게도 더 많은 것을 보게 한다. 의미를 두지 않으면 본래 ‘있음’ 그 자체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계에선 의미를 요구한다. 왜 거기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때문에 의미 없는 존재는 불안해 보인다. 불안해 보이지 않기 위해 직업으로, 관계로, 성격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설명하면서 질서를 만들어 간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고 제외하기도 한다. 필자는 가끔 질서에서 한 발짝 물러나 사물처럼 서 있는 사람들을 본다. 공원 벤치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목적 없이 걷는 사람. 그들은 해석을 거부하는 듯 보인다. 아니, 거부라기보다 무관심에 가깝다. 그 무관심이 오히려 자유처럼 보인다.
병원 대기실은 의미가 과잉되는 공간이다. 증상, 원인, 예후, 진단명. 모든 것이 언어로 정리된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가장 분명한 것은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차가운 의자에 닿는 피부, 소독약 냄새, 떨리는 번호표를 쥔 손. 어느 날 필자는 대기실에서 한 여인 손을 보았다. 아무 장신구도 없었고, 손톱은 짧았다. 그 손은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손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니피앙(기표)으로 남은 장면은 쉽게 퇴색되지 않는다.
글을 쓰는 일은 의미와 싸움이다. 문장은 늘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 그러나 필자는 점점 말하지 않는 문장에 끌린다. 설명을 줄이고 남겨 두는 문장, 독자가 머무를 수 있는 여백. 시는 그런 언어를 가장 잘 알고 있다. 좋은 시에서는 사물이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곳에 있다. 독자는 의미를 찾다가 결국 멈춘다. 그 멈춤이 시의 핵심이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서 우리는 사물과 같은 속도로 숨을 쉰다.
칸트가 말한 물자체는 인식의 한계를 가리킨다. 우리는 결코 사물을 완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한계는 결핍이 아니다. 오히려 윤리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 설명하지 않겠다는 결심. 그것은 사물을 소유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려는 욕망은 폭력으로 변하기 쉽다. 나는 이제 이해보다 거리를 택한다. 거리는 무관심이 아니라 존중이다. 타인을 시니피앙으로 남겨두는 일은 관계를 닫지 않는 방식이다.
해체주의는 중심이 없다고 말한다. 의미는 미끄러지고 고정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머물 수 있을까. 나는 표면에 머문다. 소리, 질감, 움직임. 그것들은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구조 이전의 흔적, 언어 이전의 잔여. 그것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덜 말하게 된다. 덜 말할수록 세계는 더 또렷해진다.
저녁이 되면 창밖에 불이 하나둘 켜진다. 우리는 그것을 삶의 신호, 귀가, 휴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불은 그저 켜진다. 전류가 흐르고 필라멘트가 빛난다. 나는 그 단순한 사실을 바라본다. 의미를 붙이지 않아도 풍경은 충분하다. 오히려 의미가 없기에 오래 볼 수 있다.
사물은 언제나 우리보다 먼저 있다. 그리고 우리보다 오래 남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앞에서 말수를 줄이는 것이다. 해석을 늦추고 판단을 미루는 일. 그 침묵 속에서 사물은 비로소 자기 모습을 회복한다. 의미 없는 세계는 공허하지 않다. 그것은 과잉에서 벗어난 세계다. 시니피앙만이 남아 있을 때, 우리는 세계를 소비하지 않고 함께 존재한다. 그 조용한 공존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태도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