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우주는 인간이 처음 시작하는 자궁이고 대우주는 빅뱅으로 탄생한 우주입니다. 저는 그 둘이 같다는 것을 평생 작업으로 표현해 왔습니다”전통 한옥 공간과 동시대 미술이 교차하며 경주라는 장소적 정체성이 돋보이는 경주 더안미술관에 들어서면 검은 사각형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우주’와 마주하게 된다. 한지와 먹, 원과 사각형, 혼돈과 창조, 그리고 생명의 탄생과 우주의 기원이 한 공간 안에서 공명한다.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과 세계화 가능성을 논의하는 국제 담론의 장이 경주에서 펼쳐졌다.   더안미술관(관장 백진호)은 지난 13일 박동수 개인전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와 연계해 프랑스의 저명한 미술평론가이자 큐레이터인 앙리 프랑수아 드바이유를 초청해 간담회를 개최했다. 전시는 오는 7월 28일까지. 간담회에는 박동수 작가와 사진작가 배병우, 미술평론가 김종근, 백진호 관장이 함께 참여해 한국 현대미술의 현재와 미래를 심도 있게 논의하면서 유럽 미술계와 한국 현대미술을 연결하는 실질적 플랫폼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드바이유는 이우환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박서보, 이배, 배병우, 박동수 등 한국 현대미술 주요 작가들을 수십 년간 유럽에 소개해 온 대표적 비평가다. 그는 이날 “한국 작가들은 역사와 정서에 깊이 뿌리내리면서도 동시에 보편적 언어로 세계와 소통한다”며 “배병우·박동수로 대표되는 장기적·철학적 작업 방식이 상업화 흐름 속에서 예술의 본질을 지키는 힘"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이번 전시 박동수 작가에 대해서는 “박동수의 30년 전 작품과 지금 작품은 형태는 달라졌지만 본질은 같다. 그것이 진정한 작가의 능력”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동수는 화산의 메타포다. 그의 작품은 세상이 창조되는 순간을 가장 잘 표현한다”며 “그의 검은 회화는 부재가 아니라 충만함이며 동양에서 검은색은 모든 것을 품은 색”이라고 평했다.실제로 박동수의 작업 세계는 한국 현대미술에서도 독보적이다. 1964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그는 프랑스 베르사유 시립미술학교와 파리8대학에서 수학한 뒤 1990년 파리로 건너가 20여 년간 활동했다. 2023년 프랑스 국립 기메 동양박물관 초대 개인전, 파리 갤러리 백슬래시 개인전, 아트 파리 아트페어 참가 등 국제 무대에서도 꾸준히 주목받고 있다. 그의 작업은 30여 년 동안 이어진 ‘정사각형 회화’의 집적이다. 작가는 작은 사각형 하나를 하나의 우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 수많은 사각형이 모여 다시 거대한 우주를 형성한다. 사각형 안에 새겨진 원은 행성이자 생명이며, 자궁이고 별이다. 인간의 몸과 우주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소우주와 대우주의 동일성’이 그의 예술 세계를 관통한다.그의 작품 속 핵심 키워드는 우주(Cosmos), 화산(Volcano), 원(圓), 사각형, 모태(母胎)다. 특히 ‘혼돈’을 창조의 출발점으로 보는 세계관은 그의 작품 전반을 지배한다. 그는 “혼돈은 곧 폭발이고 폭발이 끝나면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다”며 “파괴와 재창조는 하나의 순환 구조”라고 말했다.검은색에 대한 집착 역시 그의 삶과 철학에서 비롯됐다. “사람들이 ‘박동수=검정’이라고 말하길 바랐다”는 그는 유년 시절 물감을 살 수 없어 검은 연필로만 그림을 그렸던 기억을 예술적 정체성으로 승화시켰다.프랑스 국립 기메동양예술박물관 명예관장인 소피 마카리우는 박동수 작품에 대해 “현대미술에서 우주 공간의 존재를 이토록 많이 보여주는 작품도 드물다”며 “그것은 공상과학 소설 속 차가운 우주가 아니라 시적인 우주의 감각”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김종근 평론가는 “한지와 먹, 검정이라는 동양적이고 철학적인 언어가 오늘날 한국 미술의 가장 중요한 경쟁력”이라며 “박동수와 드바이유의 만남은 한국 미술이 세계와 연결되는 의미 있는 사례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이번 전시는 더안미술관 전관을 활용해 진행되고 있다. 1층에는 220개의 큐빅 회화가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풍경을 이루고 있으며 지하 전시장에는 25점의 신작이 소개된다. 개별 작품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거대한 회화로 기능하는 독특한 구조다.특히 전통 한옥 구조를 바탕으로 한 더안미술관 공간은 박동수의 검은 우주와 특별한 조화를 이룬다. 자연광이 스며드는 창, 목재구조, 절제된 전시방식이 어우러지며 박동수의 검은 우주와 한국전통공간이 공명하는 특별한 감상경험을 선사한다.이 같은 공간 철학의 중심에는 백진호 관장이 있다. 백 관장은 경주에서 130년 역사를 이어온 대추밭백한의원 5대 원장이다. 지역을 대표하는 한의학 명문가 의료의 맥을 계승하면서도 예술과 치유를 결합한 독창적인 문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그는 2024년 경주치유의집으로 이전하면서 한의원과 미술관을 하나의 공간 철학 안에 통합했다. 몸의 치유와 정신의 치유가 결국 같은 길 위에 있다는 신념 때문이다. 백 관장은 “의학적 치유가 몸의 균형을 회복하는 일이라면 예술은 감각과 내면의 균형을 회복하는 일”이라며 “이번 간담회가 한국 미술의 다음을 함께 고민하는 자리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간담회는 경주가 국제 현대미술 담론의 새로운 거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자리기도 했다. 더안미술관은 이를 계기로 국제 비평가·큐레이터 정기 초청 프로그램, 한국과 유럽 작가 교류 레지던시, 아시아 현대미술 담론 포럼, 차세대 작가 국제 진출 지원 플랫폼 등을 단계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천년고도 경주의 역사성과 한옥 공간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세계 미술계와 연결되는 새로운 모델을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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