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알려진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 순이다. 역사적으로 공인된 것은 고구려는 소수림왕2년 372년 전진의 부견왕이 순도를 통해 불교를 전파했고 백제는 침류왕때 384년 동진으로부터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파했다.
신라는 고구려보다 1백56년이나 늦게 법흥왕때 이차돈의 순교후 528년 불교를 공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릇 문화란 시공을 초월해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주변으로 전파되기 마련이다. 특히 종교란 일반적인 문화와 달리 세력확장을 위해 전쟁까지 불사할 정도로 적극성을 띤다는 점에서 1백50여년이나 늦게 불교가 유입됐다는데 이견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고구려와 백제는 거의 동시대에 전진과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반면 신라는 인접국이면서도 문화의 교류에서 제외된 것은 국력이 미약한데서 연유한다 하더라도 시간의 간극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당시 신라는 사신 조차 독자적으로 보낼 처지가 아니었다. 또 귀족세력의 권한에 비해 왕권이 미약한데다 새로운 문물인 불교를 받아들이기엔 기존의 천신신앙과 같은 정신적인 가치와의 충돌이 불가피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때문에 신라는 순교자가 나올만큼 불교의 도입에 거센 저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신라사회가 갖는 폐쇄성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신라의 불교유입이 23대 법흥왕때라고는 하지만 내물왕(17대)에서 부터 눌지왕(19대) 소지왕(21대)시절에 이미 유입됐을 가능성이 점쳐진다.
사실상 왕권의 입장에서는 고구려 백제처럼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하는 것이 귀족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 방편이기에 적극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첫째 내물왕 26년 382년 전진의 부견왕이 신라의 사신을 만났다는 것은 고구려에 불교를 전파한 것처럼 신라에도 관심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부견왕은 화북지방을 통일한 뒤 쿠차의 승려 구마라즙을 데려오기 위해 서역정벌에 나설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봉자였다.
두번째는 눌지왕(417-458)때 고구려에서 볼모생활을 하던 복호가 6년만에 돌아오고 이미 볼모생활을 했던 실성(18대)이 돌아와 16년을 다스렸다는 점에서 불교에 대한 거부감은 상당부분 희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고구려에서 묵호자가 신라로 들어와 이미 포교활동을 하고 있을때 부견이 사신을 통해 의복과 향을 전해 주었다는 점이다.
세번째는 삼국유사의 사금갑조에 등장하는 궁주와 승려의 사통문제를 볼때 이미 479년 전후의 소지왕때는 불교가 궁중내에서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삼국의 특성상 국력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인접성과 나라간에 말이 통하는 사이에서 문화교류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봐야 할 것이며 한 세기가 넘도록 신라만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특히 지증왕때 이사부가 울릉도를 정복하면서 나무로 무서운 사자상을 만들어 항복하지 않으면 사자를 섬에 풀어 놓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은 불교가 이땅에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사자는 이땅에 볼 수 없는 동물인데다 불교의 수호신이란 점에서 맹수인 사자를 전쟁에 이용할 정도로 불교는 이미 신라에 정착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단지 귀족세력과 천신신앙의 반발로 법흥왕때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가 공인되는 절차만을 남겨둔 상황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국가의 기틀은 불교 유교 한자 율령의 구비에 달려있다.
신라는 법흥왕때부터 율령을 선포하고 불국토사상과 왕즉불의 통치이념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져 나가지만 불교의 유입 정황을 보면 내물왕때부터 다져온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