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표면에는 저마다의 시간이 새겨져 있다. 나무의 결에는 성장의 시간이, 화면의 붓질에는 호흡의 리듬이, 사람의 얼굴에는 삶의 기억이 켜켜이 담겨 있다.    경주 복합문화공간 플레이스씨(PLACE C, 대표 최유진) 기획전 '결 / Grain'에서는 세 작가의 서로 다른 ‘결’을 매개로, 축적된 시간이 어떻게 표면 위의 흔적으로 드러나는지를 탐색한다.   플레이스씨에서 오는 20일부터 7월 19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서로 다른 재료와 매체를 다루는 세 작가 왕현민, 정은주, 박유아가 참여하는 3인전으로, ‘결’이라는 단어를 통해 보이지 않던 시간이 표면위로 떠오르는 순간을 조명한다.   전시의 출발점은 ‘결’이다. 한 해에 한 겹씩 제 몸에 테를 더하는 나무의 더딘 축적은 잘린 단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늬가 된다. ‘나뭇결’이라 부르는것은 그 나무가 살아온 시간의 기록이다. 결은 이렇게 두 가지 운동이 만나는 자리에서 태어난다. 하나는 보이지 않게 쌓이는 일, 다른 하나는 마침내 표면 위로 드러나는 일이다. 그래서 '결/ Grain'은 오래 반복적으로 포개진 뒤에야 겉으로 솟아오르는 그 흔적에 주목하고 있다. 세 작가는 입체 오브제와 추상 회화, 구상 회화라는, 한자리에 놓이기 어려운 매체를 각각 다루지만 모두가 아주 작은 단위를 반복해 쌓아 올리고 그 축적을 통해 본래 눈에 보이지 않던 것(구조, 숨, 타인의 내면)을 우리 앞에 불러내는 일은 매우 닮아 있다. ‘결’은 이 세 작업을 한 단어 안에 품고 있는데 왕현민의 나뭇결, 정은주의 숨결, 박유아의 살결이 그것이다. 왕현민에게 결은 나뭇결이자 골격이다. 폭 2mm 남짓의 가느다란 나무 조각을 리벳으로 사방에 잇대어 유기적인 구조를 세워 형태를 지탱하는 골격 자체를 표면으로 끌어올려 구조가 곧 무늬가 되게 한다. 그가 ‘폴리곤(Polygon)’이라 명명한 이 작업은 작은 단위들이 모여 하중을 나누고 형태를 버티는, 드러난 뼈대의 미학이다. 감추는 대신 드러내, 보이지 않는 원리를 눈에 보이는 결로 바꾼다.   정은주는 색채 추상 회화를 통해 ‘숨’과 ‘결’을 탐구해 왔다.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두터운 붓질을 수십 겹 포개고 그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감의 농담으로 평면을 무한한 공간으로 확장한다. 작가는 이 반복된 붓질을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움직임인 숨'이라 설명한다. 화면에 남은 색의 농담은 한 사람이 견뎌낸 시간의 호흡이며 우리가 그 앞에서 보는 것은 색채가 아니라 누적된 숨의 결이다. 박유아에게 결은 살결이다. 그는 한 사람의 얼굴을 한 점 한 점 쌓아 올린다. 뼈에서 피로, 피에서 살로 옮겨가며 평면 위의 형상은 차츰 체온과 호흡을 얻는다. 입양인의 초상을 담은 '위버멘쉬' 연작과 '홈' 시리즈를 통해 바깥의 이방인을 안으로 초대하는 이 몸짓은 한 생애의 결을 마주하고 그 곁에 기꺼이 머무는 일이다.   세 작가를 한자리에 묶는 또 하나의 연결고리는 ‘드러냄’이다. 왕현민은 형태 뒤에 숨는 골격을 앞으로 내놓고 정은주는 완성된 그림 뒤로 사라지기 마련인 붓질의 과정 자체를 결과로 제시하며 박유아는 타인의 내면과 가족의 사적인 이야기를 바깥으로 꺼내 보인다.    이들에게 작품의 완성이란 매끈하게 봉합된 표면이 아니라 쌓아 올린 과정이 정직하게 비치는 표면에 다름없다. 이번 전시 작품들이 빠르게 소비되기를 거부하는 배경으로, 결은 멀리서 한눈에 잡히지 않으며 가까이 다가가 시간을 들여 한 겹 한 겹을 따라 읽을 때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 연유한다.   플레이스씨 최유진 대표는 “이번 전시는 서로 다른 재료를 다루는 세 작가가 ‘쌓고 드러낸다’는 하나의 태도로 만나는 전시”라며 "작품 앞에서 잠시 걸음을 늦추고 천천히 숨을 고르며 보이지 않던 시간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순간을 자신만의 감각으로 발견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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