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내리 699번지 민간인통제선 안에 들여가면 고려말과 조선 초기의 문신이었던 강회백(1357~1402)의 묘가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1376년(우왕 2)에 문과에 급제해 고려 말 조정에서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조선조에서도 고위 관료를 지냈다. 그는 고려에 대한 절의를 중시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대 질서 속에서 유학적 이상을 실현할 길을 모색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그는 학문과 도의를 근본으로 삼는 관료로 활동하였으나 정치적 격변과 권력 재편 과정에서 중심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특히 태조·정종·태종으로 이어지는 왕위 교체와 왕자의 난 등 격동의 정국은 많은 사대부들에게 선택을 강요하였는데, 강회백 역시 그러한 역사적 전환기의 긴장 속에서 활동했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가문을 정비하는 데 힘썼다. 학문과 절의를 중시한 그의 삶은 후손들에게 도학적 전통으로 계승되었으며, 진주강씨 가문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402년(태종 2)에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고 이 묘는 조선 초 무학대사가 직접 점지해준 자리로 전해지며 연화부수형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이 묘소의 음덕으로 손자 대에서 영의정 강맹경, 강희맹, 강희안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인재들이 배출되어 진주강씨가 명문가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묘는 산봉우리의 정상부에 동향으로 자리 잡았고 멀리서 보면 평지에 불쑥 솟은 것이 마치 신라왕릉처럼 보인다. 뒤편의 주산에서부터 산줄기(용맥)가 탯줄처럼 이어지는데 마지막 순간에는 용이 승천하는 것과 같은 형국으로 보인다. 
 
이런 기이한 모습 때문에 풍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고 누구라도 이곳에 오면 감탄을 하게 된다. 이곳은 연천의 민통선 내에 있어 민간인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지만 신분증을 제출하면 답사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이곳의 산세는 연천군 왕징면 고왕리 고왕산(355m)에서 동쪽으로 뻗어 나간 지맥이 강서리를 지나 강내리로 이어졌다. 묘소는 강내리 뒷산의 봉우리에서 동쪽으로 뻗어 나온 줄기의 끝자락 산봉우리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묘는 넓은 들판에 꽃송이처럼 자리한 까닭에 영화부수형이라 하는데 실제 장마철이면 묘소 앞까지 물이 차올라 연꽃이 물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약간의 거리감은 있으나 임진강 물도 이 지역 전체를 둥글게 감싸고 흘러나가니 풍수 형국론으로 볼 때 연화부수형으로 손색이 없다. 
 
연화부수형은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모양으로 사방이 물로 에워싸인 가운데에 명당자리가 있다. 보통은 섬이나 들판 가운데에 있는 동산을 가리키며 혈처는 꽃심 부위에 있고 이 꽃은 원만한 꽃이라 군자를 배출한다고 하였다. 
 
또한 풍수에서는 혈의 사상(四象)이라 하여 혈의 종류를 와(窩)혈, 겸(鉗)혈, 유(乳)혈, 돌(突)혈 등 크게 4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이 중에서 이 혈장은 볼록한 돌(突)혈에 속한다. 돌혈은 고산의 돌혈과 평지의 돌혈이 있는데 이곳은 평지의 돌혈이라 주변 사신사가 낮아도 평지에서 부는 바람은 대개 순풍이라 괜찮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