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들의 일탈이 간간히 언론에 보도 될때마다 세간의 눈총을 사고있다. 세간의 기대치와 다른 행동에서 급기야 승려 자격논란까지 대두되곤 한다.  불교의 유입 이후 예나 지금이나 승려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승려 신분증이라 할 수 있는 도첩을 받아야 한다. 도첩제는 517년 남북조시대 북위에서 처음 시행된 것으로 당나라에서 제도화되고 신라에도 유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법흥왕때 살생을 금하고 속인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고 나온다. 또 효소왕 죽지랑조에 화랑을 핍박한 익선을 징계하면서 모량리출신 관리를 내쫓고 등용을 배제시키는가 하면 승려도 못하게 했으며 승려라 할지라도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고 나온다.  당시 원측법사는 해동의 고승이지만 모량리 사람이기에 승직을 주지 않았다고 해 도첩제가 시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측은 신라 왕족으로 15세에 당으로 가서 현장법사 문하에서 유식론을 배운뒤 입적할때까지 당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유사의 내용상으로 보면 당시 궁중내의 권력싸움에서 모량리출신의 제거라는 정치적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사기에는 선덕여왕 5년에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고 인왕경을 강독한뒤 100명에게 승직을 허락했다고 나온다. 또 흥덕왕 5년에도 150명에게 도첩을 허락했으며 진성여왕 2년 3월에는 죄인을 사면하고 6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고 돼 있다.  유사 곳곳에 보이는 승려들의 활약을 볼때 이름있는 고승들은 진골출신을 비롯해 지방귀족 출신이었다. 의상은 진골출신이며 자장 역시 진골 소판 무림의 아들이다.  진평왕때에 활약한 승려는 원광을 비롯 지명 담육으로 모두가 수나라에서 유학한 유학승이다. 그러나 신라의 도첩제는 강제성을 띠지는 않은 것으로 어느정도 자율의지에 의해 승려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더구나 법흥왕의 불교공인 이후 도읍인 경주에 절집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는 점에서 도첩제의 운용에도 한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유사에는 성덕왕때의 남백월 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 조처럼 일반인이 스스로 구도의 길로 들어서 성불했다는 얘기로 볼때 왕명에 의한 도첩에 의해서만 승려가 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사기에서 전하는 도첩기록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선덕 흥덕 진성여왕때 행해진 도첩은 왕의 건강악화로 불법에 의한 치유를 목적으로 법회를 열거나 기도를 하면서 또는 죄인을 사면하면서 승직을 허락했다는 점이다.  진성여왕은 병으로 몸이 편치않았는데 죄인을 사면하고 60명의 도승을 허락했더니 왕의 병이 나았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법회를 통해 불법을 다지고 사면과 도첩을 통해 덕을 베푸는 보시의 실행으로 부처의 가피를 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백제 역시 침류왕 원년에 불교를 도입하면서 한산주에 절을 짓고 도첩 승려 10명을 두었다고 해 국가가 인정한 승려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들어 억불정책하에서 승려가 되는 과정은 능력(시험)과 경제력이 수반되어야 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선종과 교종 중에서 하나를 택해 3개월내에 금강경 등 삼경을 외워야 하고 이를 통과하면 예조에 보고가 되어 임금의 윤허를 받는다. 윤허가 내리면 군역 대신 정전으로 포 20필을 내고 승려자격증인 도첩을 받았다.  양반자제라도 승려가 되려면 부모와 친족의 동의를 갖춰 관청인 승록사에 신청하고 임금의 윤허가 내리면 정전으로 오승포 백필을 내고 출가를 하도록 했다. 이러한 도첩제는 성종때 폐지됐다.  한편 오늘날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조계종의 경우 총무원에 행자등록을 한 후 6개월의 수행기간을 거처 5급 승가고시와 보름간의 행자교육원 교육을 마쳐야 사미계를 받을 수 있다.  사미계를 받으면서 속명 대신 법명을 사용하고 승가대학이나 선원에서 다시 공부와 수행을 한 후 4급 승가고시를 통과해야 비로소 구족계를 받고 비구가 된다. 참으로 힘들고 험난한 길이다. 중은 아무나 하나. 그러나 현실은 아무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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