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군의 신규 원전 유치 확정은 단순한 국책사업 하나를 따내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인구 감소와 지역 경기 침체, 청년 유출로 소멸 위기에 내몰린 영덕이 다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절박한 생존 전략이었다. 2017년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천지원전 사업이 백지화된 이후 영덕은 깊은 상실감 속에 긴 침체를 겪어야 했다. 수조 원 규모의 투자 기대는 사라졌고, 지역 상권과 경제는 급격히 위축됐다. 인구는 줄었고 청년들은 떠났다. 지역 사회는 사실상 ‘소멸 위기 지역’이라는 냉혹한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그런 의미에서 이번 신규 원전 유치는 단순한 개발사업이 아니라 지역의 미래와 생존이 걸린 마지막 승부수였다. 하지만 이번 과정을 지켜보며 군민들이 더 뼈아프게 확인한 사실이 있다. 바로 지역 정치권의 무기력과 책임 회피다.이번 원전 유치는 정치권이 만들어낸 성과가 아니다. 군민들이 직접 움직여 만들어낸 결과에 가깝다. 범영덕원전유치위원회를 중심으로 주민들과 사회단체들은 지난 2023년부터 거리로 나섰다. 주민 서명운동과 유치 촉구 집회, 범군민 결의대회, 정부와 관계기관 방문까지 사실상 민간이 유치 운동을 주도했다. “원전 유치만이 영덕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절박함 하나로 군민들은 움직였다. 올해 2월 군민 여론조사에서 신규 원전 유치 찬성 의견이 86%를 넘겼다. 단순한 찬반 수준이 아니라 사실상 지역 사회의 총의에 가까운 결과였다. 주민들은 더 이상 지역의 미래를 정치권에 맡겨둘 수 없다는 절박함 속에서 직접 행동에 나선 것이다.하지만 정작 지역 정치권은 어땠나. 군의원 도의원, 군수는 물론 지역구 국회의원까지 누구 하나 초기부터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며 전면에 나선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원전이라는 민감한 이슈가 자칫 정치적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계산속에 대부분은 여론의 흐름만 관망했다는 지적이 많다.특히 지역구 박형수 국회의원을 향한 지역 민심은 냉랭하다. 군민들이 직접 정부와 관계기관을 찾아다니며 원전 유치 당위성을 호소할 때 정치권은 침묵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주민들이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일 때 정치권은 사실상 여론 추이를 지켜보는 데 머물렀다는 것이다.그러다 군민 여론이 압도적 찬성으로 기울기 시작한 올 2월 이후 분위기는 달라졌다. 각종 행사와 간담회에 정치인들의 모습이 하나둘 나타났고, 원전 유치가 가시화되자 축하 메시지와 성과 홍보도 이어졌다.문제는 바로 이 지점이다. 정치는 결과만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가장 어려운 순간에 주민들과 함께했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이번 영덕 원전 유치 과정에서 지역 정치권은 늘 군민들보다 한발 늦었다. 솔직히 말하면 정치적으로 안전하다고 판단된 이후에야 움직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영덕에는 정치인이 없었다”는 냉소까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군민들은 지역의 미래를 걸고 움직였지만 정치권은 끝까지 표 계산과 정치적 유불리를 먼저 따졌다는 것이다.이번 원전 유치는 분명 영덕군민들의 승리다. 특정 정치인의 성과도 아니고 특정 정치세력의 업적도 아니다. 오히려 이번 과정은 지역 정치권이 얼마나 주민보다 여론의 눈치를 먼저 보는지를 그대로 보여준 사례에 가깝다.정치인은 여론 뒤에 숨는 자리가 아니다. 갈등과 부담이 있더라도 지역의 미래를 위해 먼저 책임지고 방향을 제시하는 자리다. 그러나 이번 영덕 원전 유치 과정에서 주민들이 목격한 것은 결단하는 정치가 아니라 끝까지 눈치를 보는 정치였다.지역 정가에서는 이번 원전 유치 과정에서 드러난 정치권의 소극적 대응과 뒤늦은 ‘성과 챙기기’ 행보가 향후 총선과 지방선거 민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군민들은 누가 진짜 지역을 위해 움직였는지 이미 지켜봤기 때문이다.이번 원전 유치는 영덕군민이 직접 만들어낸 역사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지역 정치권에 가장 뼈아픈 질문 하나를 남겼다.“정치는 과연 군민보다 앞서 있었는가.”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