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간은 일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일하면서 종종 하곤 한다. 일하는 것보다 노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등 여러 생각을 하며 실체적으로 일에 대해 정리하기로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일에 대해 나름대로 개념을 정립, 이를 정리한 후 직원들과 함께 2시간 동안 강의 형식을 빌려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후 식사 자리로 옮겨 직원들과 좀 더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가 의외로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그 후 신입사원 교육과정에서 이를 주제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신입사원 교육과정에서 강의명은 'CEO와의 대화'다. 그런데 강의의 부제가 '일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나?'인데, 이렇게 일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하니 강의 제목만 보고 대부분의 신입사원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우리 회사 시큐텍(주)은 보안 회사인데, 그렇다면 보안을 주제로 이야기해야 하지 않나? CEO가 처음 만난 신입사원인 우리와 왜 일을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일까? 등을 생각하며. 
 
그 후 받은 피드백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CEO가 신입사원인 우리에게 원하는 게 무얼까 궁금했다'이거나, '강의 중간쯤에 이르러 집중하게 되며 이게 흥미로웠다'라는 것도 있었다. 그러다가 '강의를 마칠 즈음에 CEO가 왜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라는 것들이었다.
회사에 나와서 일하는 것은 어쩌면 그저 습관적일지도 모른다. 출근하여 보통 루틴한 일을 하며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과 함께 동료들과 적당히 뒷담화하며 하루를 보낼 때가 많을 것이다. 그러다가 새로운 일을 계획하는 등, 낯선 일을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일을 하는 목적과 이유, 세부 실행 과정 등이 개인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일에 대해 원론적으로 알아보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아닌 또 다른 뭔가 새로운 하나의 일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일에 대해서 학문적으로나 실무적으로 잘 정의된 것이 없다. 일의 범위도 넓게 혹은 좁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매우 다르다. 또한 현업에서는 일에 대한 정의보다는 일을 어떻게 잘하느냐로 초점이 맞춰 있기도 하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일에 대한 정의는 매우 다양하게 표현된다. 우리는 일을 매우 세속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사실은 매우 종교적인 것이기도 하다. 최근만 해도 가톨릭교회에서는 1960년대에 일에 대해 논의하였다. 또한 올해 교황 레오 14세는 AI 윤리와 인간 존엄을 주제로 한 첫 '회칙'(encyclical) <위대한 인간성(Magnifica Humanitas)>을 발표하기도 했다.
요즘은 일할 때 선배나 동료로부터 도움받기보다는 오히려 AI로부터 더 많이 받고 있다. 그러면서 AI를 실체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매우 곤혹스러워한다. 방법론적으로 이것이 정말 맞는 것일까. 기존의 방법을 고수해야 내 일자리가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극하게도 당연하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다. 남의 변화는 필연적이며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변화에는 인색한 것이, 우리의 유전자에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아도 결코 새로운 길이 아니다. 늘 그래왔듯이 AI 또한 하나의 커다란 변화의 과정이다. 지금으로부터 1만 2천여 년 전, 수렵채집을 하던 우리의 조상은 농경시대로 접어들었다. 농경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의 '괴베클리 테페'나 '예리코'에는 이곳에서 농경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농업혁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의 변신은 무척 더뎠을 것이다. 지금처럼 앎의 전파 속도가 빠르지 않았기에 더더욱 천천히 진행되었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중국의 황하문명 간극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우리 선조들은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넘어왔다.
또 하나의 혁명이라 할 수 있는 산업혁명을 보아도 그렇다. 그 당시 노동자들은 새로운 기계에 저항하기 위해, 다시 말해 기계에게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기계파괴운동, 즉 러다이트 운동을 벌인 것이 불과 20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들은 약 5년이라는 기간 동안 일자리를 기계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봉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에도 불구하고 산업혁명은 계속 진행되었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생활은 더 편리해졌다. 특히 전기의 발명과 이로 인한 생활의 변화는 AI 혁명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일하는 방식, 다시 말해 무언가를 생산하는 방식이 바뀌면 새로운 방식을 따라야 한다. 변화가 필요하다. 이해관계로만 보자면, 변화는 나에게 이익을 줄 것인가, 아니면 손해를 끼칠 것인가가 되어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로 나뉘어 선택한다. 러다이트 운동을 일으켰던 사람처럼 생각하면 이를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지금도 수렵채집생활을 하는 일부 지역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혁명적인 변화는 반드시 다음 세대로 이어져 우리의 문명을 번영시켰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변화 후에 결코 우리의 일자리는 줄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변화의 과도기(transition period)에 일자리가 줄기도 했다.
다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에 적응하는 시간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닥쳐있는 AI 혁명 앞에서 머뭇거려야 할 시간은 많지 않다. 만일 우리가 새로운 것을 거부한다면 현재의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앨리스에게 빨간 여왕이 한 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