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유적과 문화유산의 도시이자 새로운 문화와 관광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청년들의 도시기도 하다.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고 지역의 자원을 콘텐츠로 만들며 도시의 미래를 기획하는 청년 문화 기획자, 창업가들을 만나 그들의 도전과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 첫 순서로 경주의 밤에 새로운 문화를 불어넣고 있는 바 ‘분(芬)’ 최재광 대표를 만났다.  -편집자 주. 
 
눈앞에는 은은한 조명 아래 빛나는 월정교가 펼쳐지고 경주 남천의 물결이 고요하게 흐른다. 해가 지면 경주의 밤은 전혀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칵테일 바 ‘분(芬)’ 최재광 대표(39)는 오래전부터 “이 아름다운 야경을 바라보며 술 한잔할 공간이 왜 없을까”하는 아쉬움으로, 황리단길 1호점에 이어 두 번째 칵테일 '바(Bar) 분(芬)'을 월정교를 바라보는 교촌 한옥에서 탄생시켰다.
 
그런 최재광 대표를 단순히 ‘칵테일 바 대표’이라고 부르기에는 그의 이야기가 품고 있는 결은 깊다. 17세 때 미국으로 이민 가 34세 때 경주로 귀향해 고도 경주의 밤에 새로운 문화의 불을 밝힌 청년이자, 최부잣집의 전통과 서양의 바 문화를 절묘하게 접목한 문화기획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보낸 17년의 시간과 교촌에서 이어온 수백 년의 기억이 한 잔의 칵테일 속에서 만나는 순간, 그의 공간은 단순한 술집이 아닌 ‘경주를 만나고 마시는 장소’가 된다.
 
훤칠한 키에 단정하게 넘긴 머리, 부드러운 미소가 인상적인 최재광 대표에게선 오랜 해외 생활에서 묻어나는 자연스러운 제스처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친화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최 대표는 경주 교촌에서 태어나 서울서 자랐다. 근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불리는 최부잣집 14세손(15대)인 그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는 언제나 술 빚는 풍경이 있었다. 집안의 가양주인 교동법주가 제사상에 오르고 어른들이 음복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그의 조모가 가양주를 빚는 모습을 보며 자랐지만 그것이 특별한 유산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집안 어른들의 일상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훗날 미국에서 칵테일을 배우며 그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서양의 바 문화와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보고 자란 한국의 가양주 문화가 의외로 닮아 있다는 사실을.
 
열일곱 살 무렵, 교환학생을 계기로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유학생이 되었고 이민자로 살아가게 된다. 생계를 위해 시작한 주점 아르바이트가 그의 운명을 바꿨다. 술을 만드는 행위보다 사람을 읽고 공간을 만들고 분위기를 조율하는 바텐더의 세계에 깊이 매료됐던 것이다.
 
미국 샌디에이고와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경험을 쌓은 그는 크래프트 칵테일 문화의 성장기를 현장에서 직접 체험했다. 공장에서 만든 시럽 대신 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쓰고 향과 맛의 균형을 추구하는 새로운 칵테일 문화였다. 그는 위스키 브랜드 글렌피딕의 홍보대사 역할을 맡을 정도로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화려한 경력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한국적인 칵테일’에 대한 자문이었다. 350년 된 모과나무, 150년 된 탱자나무, 교동법주, 황기와 당귀...,바로 고향 마당에 이미 답이 있었다.
 
코로나 시기 다시 경주로 돌아온 최 대표는 교촌의 한옥 찻집과 스테이를 운영하는 가족을 도우며 머물던 시간이 길어졌지만 가장 그리웠던 것은 ‘바텐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2021년 말 황리단길에 바 ‘분’을 열었다. 향기로울 분(芬) 자를 쓴 이 상호는 한국화의 거장 소산 박대성 화백이 지어주고 글씨까지 써준 것으로, 교촌마을 어르신들과의 인연 속에서 맺어진 소중한 선물이었다.
 
'바 분' 황리단길점과 '바 분' 월정교점은 경주 청년 문화의 새로운 상징이 됐다. 낮에는 카페가 넘치지만 밤이 되면 상대적으로 조용해지던 경주에서 밤에도 머물고 싶은 도시를 만드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인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메뉴는 직접 만든 수제 토닉을 활용한 진토닉이다. 황기, 당귀를 비롯한 12가지 약재를 달여 만든 토닉은 일반 토닉워터와 전혀 다른 깊이를 지닌다. 숙취 해소와 건강을 고려한 재료들이 들어가지만, 한약 냄새보다는 허브의 향과 감칠맛이 먼저 느껴진다.
 
“서양에서는 약술 문화가 발달해 있습니다. 식전에 입맛을 돋우는 아페리티보, 소화를 돕는 디제스티보 등 순서에 맞춰 약술을 즐깁니다”
 
탱자와 메스칼을 결합한 칵테일도 인상적이다. 멕시코 술인 메스칼에 교촌마을 탱자를 더하고 청양고추, 생강, 꿀, 라임을 넣어 완성한다. 성주 참외를 이용한 하이볼도 인기 메뉴다. 매년 참외로 직접 술을 담가 만드는 이 칵테일은 특히 젊은 여성 고객들에게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계절마다 메뉴가 달라지는 것도 특징이다. 가을이면 홍시가 들어가고 겨울이면 따뜻한 칵테일이 등장한다. 봄과 여름에는 경주의 제철 과일과 허브가 활용되니, 칵테일을 통해 사계절의 경주를 마시는 셈이다.
 
올해 교촌안길에 새로 문을 연 월정교점은 1호점인 황리단길 바와는 또 다른 경주의 매력을 선사한다. 바 내부에는 경주 출신 작가 김동리의 친필인 ‘청풍명월’이라는 글씨가 걸려 있다. 과거 최 대표의 집 사랑채에서는 김동리와 박목월 같은 문인들이 술잔을 나누며 문학을 논했고 그 유산은 칵테일 바로 이어지고 있었다. 술은 변화를 거쳤지만 사람과 이야기가 모이는 기능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현재 이곳을 찾는 손님의 약 60%는 외국인 관광객이라고 한다. 프랑스,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관광객들이 특히 많다고. 그들은 첨성대와 대릉원 등을 둘러본 뒤, 월정교의 야경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칵테일을 마신다.
  “맛있는 술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손님들이 편안한 공간에서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행복합니다”
  최 대표의 행보는 다분히 문화적이다. 외국인들에게 경주를 소개하고 전통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청년들이 머무는 야간 문화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경주에서 청년으로 살아가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많은 청년들이 수도권을 향해 떠나는 시대, 미국에서의 경력을 내려놓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최 대표는 “경주에서의 생활 만족도는 매우 높습니다.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니까요”라고 말한다.
  최재광 대표가 만드는 칵테일 한 잔은 고도 경주의 밤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문화적 언어로 내놓는 근사하고 경주다운 풍경으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