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흔히 사랑 때문에 아프다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를 가장 깊이 흔드는 것은 사랑보다 욕망인 경우가 많다. 욕망은 결핍을 채우려는 운동이다. 사랑은 결핍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서로 결핍을 품어주는 존재 방식이다.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인간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다. 욕망은 “내게 없는 것을 네가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상대의 아름다움, 능력, 젊음, 성공, 지위, 경제력, 다정함까지도 모두 내가 채우지 못한 빈자리를 대신해 줄 것이라 기대한다. 그래서 욕망은 언제나 미래를 향한다. 지금보다 더 많이, 더 오래, 더 완전하게 가지려 한다. 그러나 욕망은 채워질수록 또 다른 결핍을 만들어 낸다. 이를 ‘쾌락 적응(Hedonic Adaptation)’이라 설명한다. 인간은 만족함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행복은 곧 일상이 되고, 새로운 결핍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프로이트는 욕망을 충동 운동으로 이해했고, 자크 라캉은 인간 욕망은 본질적으로 타자 욕망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사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것을 욕망하며, 타인이 나를 욕망하기를 욕망한다. 욕망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다. 사회와 문화가 만들어 놓은 거울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확인하려는 과정이다. 때문에 욕망은 비교에서 시작된다. 비교는 경쟁을 만들고, 경쟁은 불안을 키운다. 현대 소비사회 광고는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결핍을 생산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는 일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비교하는 무대를 제공한다. 우리는 타인 삶을 보며 자신의 부족함을 확인하고, 또 다른 욕망을 소비한다.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오히려 더 가난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대로 사랑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를 함께 바라보는 일이다. 사랑은 서로의 상처를 지우는 기술이 아니라,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다. 내가 완전하지 않고, 너 또한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관계는 경쟁이 아니라 공존으로 바뀐다. 인간 마음은 타인 감정을 추론하고 공감하도록 진화해 왔다. 사람은 상대 표정 하나, 목소리 떨림 하나만으로도 그 마음을 상상한다. 이러한 공감 능력은 생존 전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명을 가능하게 만든 힘으로 작용했다. 사랑은 공감에서 시작된다. 상대를 고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태도, 해결보다 함께 머무르려는 자세가 사랑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다. 생명 존중도 이와 다르지 않다. 생명은 완전하기 때문에 존귀한 것이 아니라, 연약하기 때문에 존귀하다. 갓 태어난 아이도, 늙은 노인도, 병든 사람도 모두 부족함을 안고 살아간다. 부족함 때문에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랑은 생명을 경쟁력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존재 자체를 환대한다. 아름다운 청년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완전함을 사랑하다 끝내 자신에게 갇혀 버렸다. 그의 사랑은 사실 자기 욕망이었다. 반면 노년의 부부 바우키스와 필레몬은 가진 것이 거의 없었지만 서로를 끝까지 떠나지 않았다. 신들이 찾아왔을 때 그들이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풍족한 음식이 아니라 가난 속에서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었다. 신들은 바로 그 마음을 축복했다. 사랑은 풍요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결핍을 함께 견디는 자리에서 태어난다. 진정한 사랑은 화려한 영웅보다 서로 부족함을 감싸는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우리 전설 속 견우와 직녀는 만남보다 기다림으로 사랑을 증명했고, 서양의 ‘미녀와 야수’는 외모라는 허상을 넘어 존재 근원을 진지하게 바라볼 때 비로소 사랑이 시작됨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외형을 욕망하지만, 오래 남는 것은 마음에 새겨진 기억이다. 좋은 시는 결핍을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빈 공간을 남겨 독자가 자신의 삶을 채워 넣도록 기다린다. 사랑 역시 그렇다.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고, 서로 침묵할 수 있는 여백을 허락한다. 가장 깊은 사랑은 말이 많지 않다. 서로 침묵이 불편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미 결핍을 공유하는 언어를 갖게 된다. 욕망은 속도를 원한다. 더 빨리 소유하고 더 많이 성취하려 한다. 사랑은 속도보다 방향을 묻는다. 어디까지 함께 걸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욕망은 결과를 계산하지만, 사랑은 과정을 기억한다. 욕망은 소유를 통해 안정을 얻으려 하지만, 사랑은 존재를 통해 평안을 얻는다. 오늘날 많은 관계가 쉽게 시작되고 쉽게 끝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상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핍을 메워 줄 기능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기능이 사라지면 관계도 끝난다. 젊음은 지나가고, 건강도 약해지고, 성공이 무너지면 욕망은 새로운 대상을 찾아 떠난다. 그러나 사랑은 처음부터 완전함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쉽게 떠나지 않는다. 함께 늙어가는 일조차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결국 인간 삶을 오래 지탱하는 것은 욕망이 아니라 사랑이다. 욕망은 삶을 움직이는 엔진이지만, 사랑은 삶을 머물게 하는 집이다. 엔진만 있는 삶은 끝없이 달리지만 쉬지 못한다. 집만 있는 삶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 인간은 욕망으로 세상을 배우고, 사랑으로 자신을 완성한다. 사랑은 결핍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감정이 아니다. 서로 부족하기 때문에 끝내 떠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나는 생명 방식이다. 없음과 없음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 결핍은 더 이상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를 떠나지 않게 만드는 가장 깊은 이유가 된다. 인간은 무엇을 많이 가졌느냐로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서로의 결핍을 끝까지 품어 주었느냐로 기억된다. 아마 사랑은 바로 그 기억 속에 가장 오래 살아남는 인간다움의 마지막 이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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