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봄에 재미 삼아 심었던 고구마밭을 살피러 시골에 갔습니다. 아울러 고구마 고랑 옆으로는 옥수수 모종도 몇 십 묘 심어서 지금쯤은 옥수수 열매가 제법 열렸을 거란 기대에 마음이 설렜습니다. 낮으막한 야산 밑에 논으로 둘러싸인 땅이라 인적이 드물기는 하지만 그래도 산짐승들이 거기까지 내려올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맙소사! 눈을 의심할 만큼 크게 사고를 쳤더군요, 멧돼지와 고라니들이. 그다지 짧지 않은 길이의 여섯 고랑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멧돼지들이 땅을 뒤집고 파헤쳐서 이제 막 생기는 고구마를 마음껏 먹고 줄기는 패대기쳐서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데, 더 기가 막히게 고구마 고랑 곁에 키가 제법 자란 옥수수들은 고라니가 와서 옥수숫대를 쓰러뜨리고 덜 익은 옥수수 열매를 마음껏 먹어치웠더군요.    남은 걸 수습하여 겨우 옥수수 열 자루를 획득했습니다. 허탈한 마음이 왈칵 몰려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래, 올해 고구마 농사는 너네들 식량으로 보시를 잘 했네.’하며 스스로를 위로할 밖에요. 우리에게는 군것질감이지만 그 짐승들에게는 필수적인 먹거리니까 라는 생각도 하면서요. 만일 인간들에게 식량난으로 먹을 것 구하기가 어려워지면 어떨까요? 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맬서스의 인구론을 듣고 미래가 디스토피아라고 지레 걱정했던 기억이 납니다. 맬서스는 18세기의 영국의 경제학자로 그는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류의 식량은 산술급수로 증가’한다는, 즉 식량 생산 증가 속도가 인구 증가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으므로 이를 방치하면 인류의 미래는 기근이라는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맬서스가 간과하고 있던 것이 있었지요. 맬서스의 이론은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이 전제된 것이었고 과학 기술의 발달, 생태 환경과 사회 문화의 변동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후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질소 합성으로 화학비료를 생산하게 되면서 맬서스의 비관론적 인구론은 실패한 이론이 되었습니다.    화학비료 사용으로 식량 생산량이 2배나 늘었고 과학기술의 혁신은 수경재배, 복층 구조의 재배, 미생물을 이용한 재배로 전통적인 재배 방법을 보완하고 통조림이나 냉동 등의 잉여 생산물의 보관과 보존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했습니다. 또, 맬서스는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지만 20세기 들면서 인구증가세는 점차 감소하고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소멸을 걱정할 정도까지 왔습니다.   맬서스의 이론이 결핍을 두려워한 연구라면 반대로 존 B 칼훈의 ‘유니버스 25’라고 이름붙인 실험은 ‘원초적인 모든 욕구와 필요가 충족된 사회는 어떻게 될까’ 라는 주제로 물질적 풍요와 번영이 인간 사회에 미칠 영향을 살피려는 연구였습니다.    동물행동학자인 칼훈은 충분한 물과 음식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천적이나 다른 스트레스 요소가 전혀 없는 가로세로 210cm의 네모난 공간을 설치하고 쥐 한 쌍을 풀어놓았습니다. 두 마리의 쥐에게는 유토피아가 주어진 셈이지요. 쥐들은 곧 번식하고 개체수는 빠르게 늘어나 600일이 경과할 무렵 개체수는 2,200마리가 되었는데 이후로 쥐는 더 이상 번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짝짓기 공간과 짝을 차지하지 못한 무능력한 쥐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 쥐가 다른 쥐들을 공격하고 그러다가 쥐들끼리 서로 싸우고 잡아먹기까지 하며 부상으로 사망하는 쥐가 늘어났습니다. 다른 쥐의 공격에 대비하느라 쥐들은 생식활동을 중단하고 암컷 쥐들은 새끼에 대한 모성본능도 버렸습니다. 이 결과 시간이 더 흐른 후 개체수는 줄고 마리당 공간도 확보되었지만 새로 태어난 세대의 쥐들은 다른 쥐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번식 행위도 하지 않은 채 하루 종일 먹고 마시며 자기 털을 다듬어 외모를 가꾸기만 하고 그러는 동안 새로이 태어나는 세대는 없고 있던 쥐들은 자연사하며 개체수가 점점 줄다가 마침내 실험이 종료되었습니다.   실험의 윤리성에 대한 시비는 고사하고 이 실험을 인류의 미래 모습이라고 유추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한 사회에서 타인에 무관심하면서 그루밍족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외모가꾸기에 치중하는 모습,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경향의 젊은 세대를 종족 번식에 무심한 아름다운 쥐의 자리에 대입하는 이도 있습니다. 맬서스가 예측한 기아와 빈곤이나 칼훈의 실험이 보여주는 풍요 속의 극단적 이기주의나 미래를 디스토피아적으로 보는 시각에는 다름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생이 어디 그렇게 한쪽으로만 흘러가던가요? 강은 흘러가면서 큰비로 강물이 넘치기도 하고 그러면서 주위의 온갖 지저분한 것들을 몽땅 운반하여 강변을 다시 정화시키고 주위의 다른 지류(支流)들과 합치기도 하면서 큰 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갑니다. 인간 개체의 삶이 그러하듯이 하루하루가 쌓아가는 역사라는 흐름도 그럴 것입니다. 미리 비관하지도 말고 대책없는 낙관도 경계하며 사노라면 인간이, 시간이 문제를 풀어나갈 것이라고 생각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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