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산14-1번지에 가면 조선조에서 좌의정을 지낸 송강 정철(1536~1593)의 묘가 있다. 그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인이자 정치가로 뛰어난 가사와 시조를 통해 한국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로, 중종 31년(1536)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유교 경전과 문장에 두각을 나타냈다.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에서 1등을 하였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정철은 사림 정치의 한복판에서 활동하며 동인과 서인의 대립 속에 서인 계열의 핵심 인물로 성장하였다. 선조 대에 대사헌·우의정·좌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국정을 담당하였고, 특히 외교와 국방 문제에서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당쟁이 심화되면서 여러 차례 탄핵과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벼슬길에서 물러나 있을 때 오히려 문학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금강산과 관동지방을 유람하며 지은 「관동별곡」,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가사 문학의 정수로 평가된다. 송강 정철 선생은 선조 26년(1593)에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처음에는 고양시 원당읍 신원동에 묻혔으나 그곳이 물이 나는 등 흉지로 판명되자 그의 손자 정양이 현종 6년(1665)에 현재의 장소인 어은골로 이장해 왔다. 이
 
곳은 송시열의 도움으로 이장하게 되었으며 상하 두기로 조성되어 있는데 위쪽은 정철과 문화유씨의 합장묘이고 아래에는 정철의 차남인 정종명과 남양홍씨의 합장묘이다. 어은(御銀)골이란 지명은 송시열이 묘자리를 구하다 이곳의 지형을 보고 고기가 숨어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사후 창평의 송강서원, 연일의 오천서원에 제향 되었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이곳의 산세는 금북정맥 줄기인 천안시 동남구 북면의 부소산(459m)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이 진천군 백곡면의 만뢰산(611m)을 지나 문백면 봉죽리에서 환희산(402.6m)을 일으켜 본 묘소의 주산이 되었다. 송강 정철의 묘소는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나온 지맥의 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풍수에서는 ‘계수즉지(界水則止)의 원칙하에 혈은 반드시 용진처(龍盡處)에서만 맺는다 하였기에, 이곳은 기가 응집된 장소가 아니고 계속 흘러가는 과룡처로 기운이 머무를 수 없는 곳이다. 
 
옛 書에 이르기를, ‘과룡지장3대내절향화(過龍之葬三代內絶香火)’라 하여 이러한 곳에 장사(葬事)를 지내면 3대 내에 후손이 끊어지는 장소라 하여 음택뿐만 아니라 양택도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地理五訣』에서도 ‘부자(父子)가 동서로 각각 나누어져 서로 도움을 받지 못하고 굶주림으로 날마다 동분서주한다.’라고 하였다. 
 
이곳의 주변 사신사들은 겹겹이 감싸주어 대체로 양호해 장풍국을 이루어주고 있으나 수세에 있어서 외당수는 좌선수이고 내당수는 우선수이기 때문에 묘소 쪽으로 바람이 치고 들어오는 자연황천의 터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 사대부로서 기본적인 풍수 식견은 갖춘 관료로 알려져 있는데 왜 이러한 곳을 선택했는지가 의아할 뿐이다. 차라리 더 내려와 용진처에라도 자리를 잡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