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는 스님인 일연이 통상 1281-85년쯤 지은(撰) 것으로 누구나 알고 있다. 나아가 무극이 입적한 1322년 이전에 스승의 유고를 무극이 가필하고 간행한 것으로 정리해 왔다.
삼국유사는 1927년 최남선에 의해 소개된 이후 1980년부터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돼 상고사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문제는 일연 당시를 비롯해 고려때 간행된 흔적이 없다는데 있다. 소위 초간본이 없는 상태에서 남아 있는 것은 1394년 발행된 선초본과 1512년 발행한 임신본 뿐이다. 때문에 편찬시기가 정립되지 못하고 주장만 난무하고 있다.
또 학계는 2004년을 기점으로 왕력편은 유사와 별개의 책이었다는 연구와 일연 개인의 저작이 아니라 편찬(編纂)의 성격이 짙다는 점에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간행시기와 맞닿아 있는 고조선조의 해석과 일연이 직접 답사하고 글을 썼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첫째 고조선조목의 입도아사달(立都阿斯達) 이라는 글에서 일연의 주(註)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아사달을 백악궁으로 규정한 것이다. 때문에 간행시기를 1394년으로 보는가 하면 지은이까지 일연이 아니라는 도전을 받고있다.
1289년 입적한 일연이 1360년에 완공된 백악궁을 거론했다는 것은 고조선조목이 이즈음 쓰여졌거나 아니면 이즈음 누군가 첨가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지금까지 찬자가 일연이라는 확신하에 위만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고 했다는 설과 이씨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고조선으로 했다는 설로 나뉘었으나 찬자가 흔들리면 오히려 후자에 무게가 실리게 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입도아사달의 협주에 대한 규명을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의 설명없이 삼국유사의 간행시기와 지은이의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둘째는 유사에 언급하고 있는 수많은 사찰과 유적지를 일연이 과연 직접 답사하고 글을 썼는가의 문제다. 통상 문장에 나오는 지금(今)이라는표현을 들어 답사로 연결짓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표현은 일연의 입장이 아니라 채록한 글을 지은 찬자의 입장으로 보는것이 문맥상 맞다. 이러한 추론은 일연이 보양이목조에서 언급한 진양부의 공문첩이 단서다.
최씨정권의 진양부가 1230년 5도안찰사로 하여금 전국의 교종 선종 사찰들의 창건 연월과 모양을 조사하여 문서화 했다는 것이다.
일연이 이러한 문서나 사적기를 채록한 것이라면 지금의 의미가 명확해 진다.
지금까지 탑상 30편의 글 중 지금(今)이 등장하는 12조목은 일연이 답사하여 쓴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가섭불연좌석의 경우 일연이 두번이나 방문하고 쓴 글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일연의 시대적인 행보로 볼때 1238년 몽고병화 이전에 비슬산을 떠나지 않았다면 '전에 한번 본일이 있다'는 표현은 일연이 아닌 당시 기록자가 본 것으로 봐야한다.
더구나 어산불영조에서 지금와서 친히 예를 올리고 보니(今親來瞻禮)라는 표현을 두고 일연의 답사를 사실화 했다. 그러나 어산불영조목은 보림이 보고한 기이한 사적기를 조사자가 와서 확인하는 과정에서 친히 예를 올렸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백률사조목 역시 '문번부재'라 하여 글이 너무 복잡해 다 싣지 않는다고 한 것을 보면 원전의 글을 보고 요약해서 쓴 것이지 답사와는 거리가 멀다.
또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조목에서 사불산은 천책의 유사불산기를 채록한 것이며 굴불산 역시 답사가 아니라1230년대의 석불사사적기를 인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도 남월산 천룡사 무장사미타전 조목 들도 일연의 답사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유사의 각 조목에 언급된 지금의 문제는 진양부의 문서처럼 결국 사찰과 유적에 대한 조사자의 시각에서 본 시점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일연이 경주를 방문한 것은 단 한번으로 1281년 충렬왕이 마산 합포에서 여몽연합군의 2차출정을 격려하고 귀경하는 길에 경주를 방문할때 조우한 것에 불과하며 유적의 답사와는 거리가 멀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