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나무를 알지 못했다. 그러다 천양희 시인의 '오래된 농담' 시의 첫 소절에서 회화나무라는 이름을 처음 만났다. '회화나무 그늘 몇 평 받으려고 언덕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또한 시의 내용이 해학적이어서 공연에서 종종 시극으로 이 시를 만났다. 그 후 '회화나무는 어떤 나무일까?' 하는 궁금증이 오래 남았다. 금년봄 초정요양원에 공연하러 갔다. 요양원 입구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나무가 눈을 끌었다. 햇살을 머금은 잎들은 금빛 물결로 반짝였다.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무척 궁금하여 사진을 찍어 AI와 직원에게 물어보니 뜻밖에도 황금회화나무라고 답하였다. 시 속에서만 상상하던 회화나무가 눈앞에 서 있었다. 감개무량하였다.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학자와 선비의 나무로 불렸단다. 중국에서는 삼공(三公)이 조정에서 정사를 논하던 자리 주변에 회화나무를 심었다고 하여 권위와 학문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을 어귀나 서원, 향교에 많이 심어져 지혜와 덕망을 상징하는 나무로 사랑받아 왔다. 6월 초 증평 역사인문학반에서 문학기행을 해미읍성으로 갔다. 그곳에서 또 다른 회화나무를 만났다. 해미읍성의 회화나무는 특별한 사연과 슬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해미읍성은 조선 시대 충청병영이 있었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곳은 또 다른 아픔을 품고 있었다.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아 순교한 장소이기도 하다. 회화나무 뒤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있던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으며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현재까지도 희미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문화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나무가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병들어 대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나무가 이토록 깊은 병을 얻은 것은 1800년대 후반, 이 땅을 휩쓴 박해의 칼날 아래서 나무는 억울하게 끌려온 이들의 비명과 간절한 기도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신자들을 매달았던 거친 가지는 비극의 증거가 되었고, 그들이 흘린 눈물과 피는 나무의 뿌리를 적셨다. 말 한마디 못하는 나무였기에 그 고통은 고스란히 안으로만 파고들었을 것이다. 슬픔을 삼키고, 비극을 감당하느라 나무의 속은 서서히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비어버렸다. 뒤늦게 나무의 몸속 썩은 살을 도려내고 시멘트를 채워 넣는 수술을 감행했다. 차갑고 딱딱한 시멘트는 회화나무가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지지대이자, 동시에 그날의 기억을 묻어둔 흉터이기도 하다. 비록 인공의 물질로 몸을 채웠을망정, 회화나무는 매년 봄마다 다시 푸른 잎을 틔워낸다. 그것은 자신을 스쳐 간 수많은 영혼을 위로하고, 비극의 역사를 절대 잊지 말라는 소리 없는 외침일 것이다. 우리는 시멘트로 얼룩진 그 거친 기둥을 바라보며, 나무가 대신 짊어져 준 그날의 슬픔과 생명의 숭고함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해미읍성의 회화나무에서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과거에 머무르기 위함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다. 나무가 상처 난 가지를 안고도 새잎을 피워내듯, 우리 역시 상처를 품은 채 희망을 키워가야 한다. 그래서 회화나무의 그늘은 단순한 쉼터가 아니라 역사와 인간성, 그리고 희망을 되새기는 배움의 공간이 된다. 회화나무는 오늘도 해미읍성 하늘 아래에서 푸른 잎을 흔들고 있다. 그리고 그 잎새마다 역사의 기억과 인간의 희망을 담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천년의 세월을 향해 자라는 그 나무처럼, 우리 또한 서로를 품어주는 넉넉한 그늘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은 관광객과 순례객들에게 넉넉한 그늘을 내어주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고 있다. 사람이 살면서 기쁨과 슬픔을 만나듯, 회화나무는 내게 다가와 기쁨이 되고 슬픔도 되었다. 시(詩)에서 이름을 만났고, 황금빛 나무에서 아름다움을 만났으며, 해미읍성에서 역사의 슬픔을 만났다. 그리고 그 세 번의 만남은 하나의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아름다움은 기억을 만나 깊어지고, 역사는 생명을 만나 희망이 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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