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은 조선의 제9대 왕 성종(1457~1494)의 능으로 이곳에는 원래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묘가 있었으나 이장케 하고 단릉으로 능침을 조성하였다. 성종에게는 세 분의 왕비가 있었는데 첫 번째 공혜왕후(1456~1474)는 19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여 파주에 묻혀있다. 
 
그다음 제1 계비는 폐비윤씨(1455~1482) 이고 그의 묘소 이름은 회묘(懷墓)로 처음에는 경기도 장단에 매장하였으나 연산군이 집권하면서 동대문구 회기동으로 이장해와 회기동의 지명유래가 되었다. 
 
그러나 1967년 이곳에 경희의료원이 들어서면서 서삼릉의 비공개 구역으로 또다시 이장하였다. 그녀는 연산군의 생모로 생전의 삶이 파란만장했던 것처럼 죽어서도 3번이나 이장을 당하는 등 불운이 계속 이어졌다. 
 
윤씨는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가 되었고,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남편인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낸 일로 폐비(廢妃) 되어 사사되었다. 사사 당시 윤씨는 친정어머니에게 세자가 자라서 왕이 되거든 피를 토한 금삼을 넘겨줄 것을 유언했고, 이는 후일 갑자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다음 제2 계비인 정현왕후는 중종의 친모로 현재 선릉의 좌측 뒤편 능선에 모셔져 있다. 성종은 16남 1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공혜왕후는 무자식이었고 폐비윤씨의 아들이 연산군이다. 그리고 정현왕후의 아들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이고 나머지 자녀들은 모두 후궁들의 소생이다. 
 
성종은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향년 38세로 세상을 떠났으나 정치 문화의 전성기를 이끈 성군으로 평가된다. 
 
초기에는 세조의 왕비였던 정희왕후와 의경 세자의 빈이었던 인수대비의 수렴청정 아래에서 정사가 이루어졌으나 성장 후 친정을 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학문과 인재 등용을 중시하여 재임 중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반포하였고, 역사서인 <동국통감>과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 악보를 정리한 <악학궤범>, 예법의 절차를 기록한 <국조오례의> 등 수많은 책들을 간행하였다.
이곳의 산세는 한남정맥인 용인시 백운산(565m)에서 북으로 뻗어 올라간 지맥이 과천시의 청계산(592m)을 일으키고 여기서 한쪽 자락이 서쪽으로 뻗어 나와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관악산(629m)을 일으킨다. 
 
선릉은 관악산에서 다시 북동쪽으로 뻗어 올라간 지맥이 서초구의 우면산(312.6m)을 지나 계속 올라가 강남구 삼성동에서 본 묘역의 혈장을 만들었다. 
 
이곳은 현재 도시개발로 인해 주변의 용맥도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지만 일제 강점기의 구 지도를 보면 성종의 능역은 사신사가 잘 갖추어져 있다. 좌측으로 좀 떨어진 능선에 안장된 중종의 정릉도 나름 갖추어져 있으나 좌측 바로 뒤편에 있는 정현왕후의 묘역은 그러하지 못한 것 같다. 
 
이곳의 수세는 전체적인 물길이 우측에서 좌측으로 흐르는 우선수이고 과거 능역 아래쪽의 큰 연못은 명당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홍수가 범람할 때는 한강 물이 탄천으로 역류하여 이곳까지 들어왔을 거라는 예상이 된다. 근래 들어서도 많은 비가 내리면 묘역 앞으로 물길이 형성되어 아래쪽으로 물이 들어차는 형국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