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자, 독립운동가이신 김구 탄생 150주년(白凡 金九, 1876. 8. 29~1949. 6. 26)이 되는 해다. 1895년 8월 21일 새벽 3시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주도하는 낭인들이 왕비의 침소인 경복궁 건청궁(乾淸宮)을 급습했다. 국모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그 자리에서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른다. 여걸 명성황후는 한 줄기 푸른 연기로 화해 버렸다. 조선의 백성들은 울분을 터뜨렸다. 1896년 2월 스무 살의 청년 김창수(金昌洙, 김구)는 안악군 치하포 주막에서 시해에 관계된 일본 무사 쓰치다(土田壤亮)를 죽이고 명성황후의 원한을 갚는다. 그는 인천 감옥에서 사형을 구형받아 수감 중, 사형 당일 다행히도 사흘 전 개통된 행정 전화로 고종이 중지 명령을 내려 살 수 있었다. 1898년 3월 김구는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승려 원종(圓宗)으로 1년간 살게 된다. 대웅보전 옆 ‘白凡堂(백범당)’이 그가 은거하던 곳이다. 후일 광복 후인 1946년 4월 공주 특별 강연 차 마곡사를 방문하여 ‘佛’ 자 휘호와 기념 식수를 하였다. 지난 7월, 서른 해 만에 마곡사(麻谷寺)를 찾았다. 세종, 대전에 접한 곳에 이런 오지가 있으랴? 실제 여기는 6.25 전쟁이 난 것도 몰랐다고 한다. 공주에서 이어진 지방도는 그대로인데, 온통 알밤나무가 우거진 ‘율곡(밤골)’이다. 옛날 전국도로 지도책자를 보며 찾아가던 그 때가 아련했다.1932년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는 이 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 인사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된다. 백범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숨은 곳은 항저우 남쪽 자싱(嘉兴)의 난후(南湖) 주변 주택이었다. 지금 ‘백범 김구 선생 피난처’가 붙어 있다. 호수에 잇닿아 있는 집은 2층 마루바닥을 열면 비상 하강봉이 있고 쪽배 한 척이 늘 대기하고 있다.당시 김구의 현상금은 현재 화폐가치로 200억이었다. 이 집은 주푸청(褚輔成)이라는 중국인의 아들 별장이었다. 정부는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6년 주푸청 손자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다.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1945년 2월 24일 광복군과 미군특수부대(OSS) 합작으로 한반도와 일본에 침투하여 첩보활동을 벌이자는 독수리작전(The Eagle Project)을 수립한다. 5월부터는 60명의 요원을 선발해서 5개 전략지점(서울, 부산, 평양, 신의주, 청진)에 공작원을 침투시킬 맹훈련을 시작한다.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드디어 한국은 광복을 맞이 했다. 하지만 김구는 수년간 준비한 작전이 무산되고 더욱이 다른 나라의 개입으로 이룬 광복이었기에 앞날이 걱정되었다. 1945년 11월 3일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환국기념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상하이를 거쳐 11월 23일 귀국한다. 마침내 파란만장한 27년 간의 항일투쟁을 접고 역사적인 환국을 하는 것이다. 미 군정청은 정부 차원이 아닌 ‘개인 자격’ 입국만을 허락했다. 김구 등 제1진 15명은 미군C-47 수송기를 타고 김포비행장에 내려 서울로 이동했는데, 그날의 자서전은 그렇게 참담할 수가 없다.‘차창으로 농부가 보였다. 나는 태극기를 앉은 채로 올려서 그 농민에게 흔들어 주었다. 그러나 이것도 제지당하고 말았다. 아무라도, 맨 먼저 만나는 농부에게라도, 맞붙잡고 실컷 울고 싶건만, 그러나 우리는 미군의 직전 대상물로 장갑차에 실려가고 있다. 이 행렬 속에 김구 주석이 혁명투사인 민족의 지도자가 있는 줄은 생각도 못하리라…’(장준하, 돌베게)1949년 6월 26일 하오 1시 20분 경교장에 육군 소위 안두희가 찾아와서 면담을 청했다. 수행비서 선우진은 군복에 권총을 찬 그를 마뜩찮게 보지만, 평소대로 2층으로 안내한다. 선생은 여느 때처럼 흰 한복 차림에 남쪽 창가 서안에서 독서와 서신 휘호를 하신다. 안두희는 이내 권총 네 발을 발사한다. 그리고는 ‘내가 선생을 쏘았소!’ 라며 계단을 내려온다.중국 대륙 이국 땅에서 스물 일곱 성상 일제의 검거를 피해 오신 풍운의 老 정객이, 고국의 동포에게 암살 당한 것이다. 안두희는 미국 육군방첩대(CIC) 정보요원이었다. 그의 호텔식 수감 생활을 보면 이승만 정권의 비호는 있었다. 안두희는 1년 후 한국전쟁이 터지자 사라지고 만다. 암살의 배후는 지금도 의문으로 남아있다.경교장에는 그날 선생이 입었던 혈의(血衣)와 동지 엄항섭(한국독립당)의 추모사가 전시되어 있다. ‘선생님은 가셨는데 무슨 말씀 하오리까? 우리들은 다만 통곡할 뿐입니다. 울고 다시 울고, 눈물 밖에 아무 할 말도 없습니다….’장례에는 무려 124만 명의 조문객이 문상을 하였다. 7월 5일 9시 50분 경교장을 떠난 선생의 영구는 거리의 인파 속에, 종로를 거쳐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을 거행하였다. 국군의 조포를 시작으로 분향과 헌화, 국무총리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의 조사에 이어 육군 장병의 조총소리로 영결식을 마쳤다. 영구는 3천만 겨레가 슬퍼하는 가운데 효창원에 안장되었다.선생은 서산 대사의 시 ‘답설(踏雪)’을 즐겨 휘호하셨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김구 선생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냐고, 너는 어떤 길을 가고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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