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죽음을 숙명처럼 지니고 살기에 우린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한 발짝씩 다가가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이런 이치가 인간에게만 국한 되랴. 하다못해 땅 위를 기어 다니는 지렁이도 생명이 다하면 죽음을 맞게 된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이듯 아무리 화려하고 예쁜 꽃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생명력을 잃는다. 이렇듯 세상 모든 만물은 생성(生成)이 있으면 소멸(消滅)도 반드시 뒤따르는 법이다. 이로보아 영원불멸은 없다. 하지만 이런 진리 앞에서도 언제까지나 곁을 지켜줄 듯 했던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가족이나 부모를 잃는다면 그 슬픔은 필설로 이루 형언 할 수가 없다. 필자역시 지난 해 친정 노모 별세 이 후, 여태껏 그 슬픔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어머니에 대한 애도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이런 심정은 필경 필자만은 아닌 성 싶다. 지인 역시 요즘 얼마전 고인이 된 친정아버지 생각만 하면 슬픔을 가눌 길이 없단다. 몇 달 전 그 지인의 친정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을 찾았었다.   이 때 그곳이 여느 곳과 다름을 느꼈다. 상주(喪主)들의 구슬픈 곡소리가 문밖까지 울려 퍼져서이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하여도 상가(喪家)를 찾으면 대문 밖까지 상주들의 울음소리가 새어나오곤 했었다. 그러나 요즘은 어인일인지 부모상을 당하여도 그 슬픔의 강도조차 희석된 듯하다. 장례식장에서 상주들 눈가가 눈물로 젖기는커녕 물기조차 없이 보송보송 한 것을 자주 목격하곤 한다.   그곳에 이르러 문상(問喪)을 할 때 고인의 영정 사진이 눈에 띄었다. 그 사진 속엔 온통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의 노인 분이 담담한 표정으로 필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평소 지인이 들려주던 이야기가 문득 생각났다.   지인의 친정아버지는 6,25 전쟁고아란다. 그는 결혼 후 억척스럽게 온갖 궂은일을 다 하여 6남매를 모두 남부럽지 않게 장성 시켰다고 했다. 더구나 일찍 아내가 병사(病死)하자 어린 지인을 등에 업고 군고구마, 호떡 장사, 포장마차 등을 하여서 자식들 생계를 돌봤단다.   이 생각에 잠기자 갑자기 당시 그분의 고달팠던 삶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지인 부친의 경우 천애 고아로서 빈주먹으로 일가(一家)를 이뤘잖은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의 삶을 떠올리노라니 그동안 누군가의 인생사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 없이 평판하기 일쑤였던 점이 못내 뉘우쳐졌다. 상대방이 겪음직한 수많은 삶의 고난과 역경에 대해선 피상적으로만 바라보았던 게 사실이다. 그 분이 살아온 날들은 개인의 인생 궤적이긴 하다. 하지만 어찌 보면 개개인의 이러한 삶의 여정이 밑바탕이 돼서 오늘날 이만큼 사회가 발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만약 이 분이 가족들도 ‘나 몰라라’ 내팽개치고 주색잡기나, 노름 등에 빠져 지냈더라면 자식들은 어찌 되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노라니 고인의 지난 삶이 참으로 남달랐다는 생각마저 든다. 자신이 처한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가정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한 그분이야 말로 작은 애국자란 생각에 몇 번이고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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