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들중 가장 금슬이 좋았던 왕은 42대 흥덕왕이었다. 흥덕은 역대 왕들과 달리 오직 왕비만 바라 본 것으로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흥덕왕은 826년10월에 즉위하고 두달만인 12월에 왕비인 장화부인이 죽자 사모의 정을 잊지못해 이후 재위 11년동안 혼자 살았다. 신하들이 재빙을 권했으나 새도 짝을 잃은 슬픔이 있거늘 좋은 배필을 잃고 어찌 재취를 하겠느냐며 시녀조차 가까이 하지 못하게 했다. 유언에도 부인의 능에 합장하라고 하는 등 다른 왕들과 차별화를 보이고 있다. 무열왕의 경우 임금이 되기 전에 부인이 있었고 유신의 작은 동생 문희를 또 부인으로 맞이한데 이어 큰동생 보희를 후처로 맞이 했다. 또 사위로서 왕위에 오른 48대 경문왕은 왕위에 오른지 3년만에 처제를 후처로 맞이하기도 했다.  이처럼 신라의 혼인제도는 다처제인 동시에 근친이 다반사인데도 흥덕은 왕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재취를 물리치고 홀아비로 지냈던 것이다.  삼국유사 흥덕왕 앵무조에는 당나라에서 가져온 한쌍의 앵무새가 오래지 않아 암놈이 죽자 홀로된 수놈이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왕이 앵무새앞에 거울을 걸어 놓자 거울속의 그림자를 보고 제짝인 줄 알고 거울을 쪼아 보고는 그림자인 것을 알고 슬피울며 죽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는 왕후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라는 설과 흥덕왕의 정치적입장이라는 상징성으로 풀이하고 있다.  흥덕왕은 41대 헌덕왕과 형제사이로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형인 헌덕이 먼저 왕위에 오르고 형의 4아들을 제치고 다음 왕위를 물려 받게 된다. 흥덕왕은 왕위계승의 불안정성이 말해주듯 왕권강화를 위해 경덕왕처럼 율령격식의 정비 등 한화정책을 구사한다.  그러나 앵무새가 거울의 그림자를 쪼다 죽는 것처럼 모방한 정책이 왕권을 강화하지 못하고 실패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군주로서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으나 일상생활에서 신분층이 지켜야 할 법령의 정비를 비롯 분에 넘치는 사치를 금한 것으로 보아 현군이라 평가할 수 있다.  더구나 통상적인 군주라면 왕비의 죽음 이후 정략적으로나 정치적인 후원세력의 확보차원에서라도 후비를 맞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음에도 그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타 군주의 일탈과 비교된다.  21대 소지왕의 경우 날이군 지금의 영주땅을 순행하다 지방민 파로의 딸 벽화의 미색에 빠져 결국은 궁으로 데려와 별실에 두고 아들까지 낳았다고 사기에는 기록돼 있다.  이같은 소지왕의 일탈은 유사에 언급된 재위 10년 488년에 발생한 사금갑 사건의 반발일 수 도 있다.  왕의 첩인 궁주와 분수승의 사통이야기는 불교전파를 저지하려는 귀족세력과 불교옹호 세력간의 갈등을 다룬 것이지만 당시 궁중내의 문란한 성풍조의 단면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26대 진평왕의 아버지 동륜태자는 궁궐내에서 사통을 일삼다 궁궐담을 뛰어넘다 떨어져 개에게 물려 죽었다는 기록은 상류층의 일탈이 만연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또 49대 헌강왕은 수렵하다 길에서 만난 여인과 정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훗날 52대 효공왕이다. 왕들의 일탈행위에 이어 군신들의 일탈도 등장한다. 642년 대야성전투(합천)에서 패한 품석은 춘추의 사위로서 대야성도독에다 이찬의 벼슬이었다.  그러나 미색이 출중한 부하의 아내를 빼앗아 원한을 사기에 이르러 결국 적과 내통한 부하가 창고에 불을 지르는 등 민심이 이반돼 전투에서 패하자 처자를 죽이고 자신도 자결한다.   문란한 성풍속의 끝판왕은 51대 진성여왕이라 할 수 있다. 등극후 2-3명의 미소년을 침실로 불러들여 음란을 일삼고 그들에게 요직을 맡기는 등 난정을 편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백제 개루왕은 일반 백성의 처를 탐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남편인 도미의 두 눈을 파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처럼 궁중내의 비사가 버젓이 사기에 기록될 정도니 당시의 절대군주시대에 있어 흥덕왕의 왕비에 대한 일편단심은 의외의 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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