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나이 들고 늙어 갈 것인가. 이 의문에 이름 없는 들꽃 같은 어르신들의 전시가 그 해답을 전한다.
 
경주 불국사 인근 진현동 할머니들이 살아온 시간을 그림과 말로 기록한 ‘할머니의 시간(진현동 할머니 그림)’전이 프레지던트 신라갤러리에서 오는 23일까지 열린다.
경주시가 주최하고 ‘호작질예술로하자’가 주관하며 경주시 농촌활력과가 지원하는 이번 전시는 ‘2026년 경주시 주민(마을)공동체 공모사업’의 하나로 마련됐다.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어르신들과 함께 수업을 이끈 손 영 작가는 올해로 19번째 개인전을 연 중견 작가로, 진현동을 중심으로 진행된 ‘생활기록 프로젝트-할머니들의 손과 말로 남기는 마을의 시간’의 결과물을 이번에 선보인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전시다.
전시장에는 진현동 일대에서 살아온 70~90대 할머니들의 그림과 삶의 이야기가 나란히 놓였다. 그림 속에는 한 시대를 통과한 여성들의 삶이 절절하게 담겨 있다.맏종부로서 차려냈던 제사상, 평생을 살아온 집, 지천인 꽃과 나무, 가족의 모습이 그림이 됐다. 고된 삶을 지나 자식들을 키워낸 세대의 기억과 애환이 담겨 있는 그림에는 ‘아들 낳아서 미역국 먹었다. 암만 없어도 쌀밥 먹었다’, ‘행복이 어딨노. 천날 만날 고생만 했지. 인자 소원 없니더. 자식 잘 사는 게 소원이지요’ 같은 정겨운 사투리가 여과없이 적혀있다. 
85세 장정숙 할머니에게도 이번 전시는 생애 경험하는 특별한 일이었다. “전시를 하다니...,굉장히 행복하고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처음 그림을 그릴 때만 해도 하얀 종이를 앞에 놓고 무엇을 그려야 할지 막막했고 잘 그릴 자신도 없었다'는 할머니는 손 영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열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달라지기 시작했다. "생각대로 그리면 된다며 조금씩 가르쳐줘서 시작했어요”전시장에 걸린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쑥스러움과 함께 은근한 자심감도 묻어난다. 자녀들에게 전시 사진을 보내 자랑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이번 전시의 출발점에는 '미술 치료'가 있었고 손을 움직여 그림을 그리고, 질문에 답하며 오래된 기억을 꺼내고 그 기억을 자신의 언어로 남기는 과정 자체가 이번 프로젝트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프로젝트를 이끈 손영 작가는 150여 회의 그룹전과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으며 컬러풀대구미술부문 추진위원장, 열린미술축제·환경다시보기전 등 여러 미술행사의 기획자로도 활동했다. 대구에서 활동하다 8년전 경주 진현동으로 작업장을 옮긴 뒤, 어르신들과 꾸준히 미술 수업을 이어왔다. 손 작가는 "제가 살고 있는 진현동 어머니들에게 치매예방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려야 되겠다 생각하고 미술 수업을 시작한 게 여러해 전이었어요. 이 사업을 시작하기 훨씬 전이었죠"라고 말했다. 처음엔 치매 예방과 정서적 안정을 돕기 위한 작은 미술 활동으로 시작했지만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작업의 의미는 자연스럽게 ‘삶의 기록’으로 연결됐다.
손 작가는 “우리가 누리는 오늘은 그분들이 버텨낸 시간 위에 놓여 있다”며 “이 미술 놀이는 어느새 격동의 시간을 살아오신 할머니들의 삶을 기록하는 일이 됐다”고 말했다.이어 “그림 한 장, 이야기 한 토막마다 한 시대를 건너온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며 “그분들이 견디고 버텨낸 시간 위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고 전했다.특히 손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손의 움직임과 기억의 회상이 함께 이뤄진다는 점에 주목하며 이는 치매 예방으로 이어진다고 강조한다. 어르신들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이를 그림이나 말로 표현하는 과정이 정서적 환기와 자존감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완성된 그림을 들고 환하게 웃는 할머니들의 모습 역시 이 작업이 남긴 중요한 변화라고 설명했다.경주시 관계자도 이번 사업을 마을의 인적 자산을 활용한 공동체 활동으로 평가했다. 경주시 관계자는 “주민과 마을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활동하는 주민공동체 공모사업의 취지에 맞게 이 프로그램에서는 마을의 인적 자산인 어르신들을 잘 활용하고 있다”며 “할머니들의 취미 활동에도 의미가 있고 공동체가 다시 살아나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 작가는 할머니들의 구술 기록도 꾸준히 이어왔다. “어르신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다음 세대는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책으로도 엮고 있다. 전시에 이어 구술과 그림을 함께 묶어 마을의 기록이자 한 세대의 생활사를 기록하겠다는 것이다.전시장의 그림과 글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할머니의 시간’이 천천히, 잔잔하게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