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락을 따라 흐르는 시간과 마을의 기억, 오래된 나무의 표정, 그리고 그 풍경을 바라본 시선이 먹빛 사이사이에 스며들었다. 한 점, 한 점 쌓아온 붓길들이 어느덧 20년을 맞았다.
경북지역 한국화 작가들의 모임인 한국화 묵연회(회장 박병숙)가 창립 20주년을 맞아 특별기획전으로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새로운 붓길을 모색한다.‘한국화 묵연회-붓길 20년, 자연을 담다’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는 11일부터 30일까지 군립청송야송미술관에서 열린다. 전시와 함께 회원들의 작품과 묵연회의 20년 역사를 정리한 도록도 발간됐다.이번 전시는 수묵을 기반으로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며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해 온 묵연회 회원들의 정수가 담긴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뜻깊은 자리다. 전시장의 묵향 속에는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고뇌하며 일궈낸 창작의 고통과 환희가 담길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정회원으로 권숙정, 김경해, 박병숙, 박영오, 서인숙, 심상흠, 오순옥, 이규익, 이나윤, 이상호, 임외숙, 최순희, 지도교수 강민수의 작품이 출품된다.
명예회원으로는 강성애, 김건현, 김경순, 김광수, 김영매, 김영숙, 김영옥, 김정란, 남경오, 문해숙, 박강진, 배계주, 손은애, 신재경, 이순희, 이옥희, 임안희, 임정민, 전규혁, 정병옥, 조귀순, 최경희가 참여한다.묵연회는 지난 2004년 포항을 중심으로 한국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 출발했다. 2008년 제1회 회원전을 시작으로 꾸준히 전시를 이어오며 경주·포항·안동·청송·의성 등 경북 곳곳에서 사생과 연수를 이어왔다.특히 묵연회의 출발은 대학이나 제도권 미술교육을 거친 작가들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그림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이들이 주말과 방학을 이용해 스스로 배우고 익히며 한국화의 길을 개척했다.
그들 중심에는 지도교사인 강민수 화백이 있었다. 강 화백은 교직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창작을 멈추지 않았고 퇴직 이후에는 더욱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며 경주 화단의 원로 작가이자 묵연회의 든든한 스승으로 회원들을 이끌어왔다.회원들은 매월 경북 일대의 명승지를 찾아 현장 사생에 나섰다. 눈앞에 펼쳐진 산과 물, 마을과 나무를 그대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각자의 시선과 감각으로 풍경을 해석하는 법을 배웠다. 오랜 시간의 사생과 연수는 회원들의 기량을 끌어올렸고 대한민국미술대전을 비롯해 경북미술대전, 신라미술대전 등 전국 및 지역 공모전에서 입상하며 역량을 인정받았다. 일부 회원은 공모전 초대작가와 개인전 작가로 활동하는 등 작가로서도 성장을 이어왔다.
지역의 전문적인 미술교육 기반이 약해지고 한국화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경험할 기회가 줄어드는 현실에서 묵연회는 배움과 창작, 전시와 교류가 이어지는 터전이 돼왔다.박병숙 회장은 이번 20주년 전을 작품을 펼쳐보이는 전시 이상의 의미로 설명한다. 박 회장은 “척박한 예술 환경 속에서도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 하나로 묵묵히 창작 활동에 매진해 온 회원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지난 20년이 가능했다”며 “이번 전시는 긴 세월 동안 켜켜이 쌓아온 우리들의 땀방울과 예술혼이 담긴 뜻깊은 자리”라고 말했다.그러면서 “작가들에게는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되고 관람객에게는 일상 속 작은 위로와 감동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이번 전시가 특별한 것은 20년이라는 시간의 지층뿐만 아니라 전통 수묵을 바탕으로 출발한 묵연회의 작업이, 회원 각자의 경험과 관심에 따라 과거의 형식을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로 조금씩 다른 풍경으로 확장됐다는 점이다. 명승지뿐 아니라 사라지는 마을, 훼손되는 자연과 사람들의 삶까지 묵연회의 풍경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박선영 경주미술사연구소 연구자이자 화가는 묵연회 20년에 대해 "이번 전시는 지나온 시간을 기념하는 자리인 동시에 한국화의 다음 가능성을 향하는 새 출발점이 될 것”이라며 “묵연회가 쌓아온 깊은 먹빛 위에 각자의 개성과 동시대의 시선이 더해져 경북을 넘어 더 넓은 한국 화단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윤경희 청송군수는 “전통 수묵과 수묵·담채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이번 전시는 한국화가 가진 폭넓은 스펙트럼과 깊이를 조망할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와 함께 발간되는 도록에는 이번 전시 출품작뿐 아니라 역대 회장과 묵연회의 연혁, 정기회원전 현황, 회원 개인전 활동, 회원전 발자취 등을 두루 담아 20년의 흐름을 기록했다. 이번 전시는 전통 수묵이라는 오래된 언어가 오늘의 풍경과 만나, 그 지평을 어디까지 새롭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리로 보인다.